Review_Society of Clothes
옷장 속 사람들 Society of Clothes | 2024 | 15mins | dir. 정다희 JEONG Dahee
Cogito Incognito, 없음을 생각함으로써 존재한다*
# 01. 사유
시간, 공간, 시공간, 부재, 움직임/운동...
정다희는 사유한다. 정다희의 애니메이션은 사유한다. 정다희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 02. 존재
<나무의 시간>(2012)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존재가 있다.
<의자 위의 남자>(2014)는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존재가 있다.
<빈방>(2016)은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존재는 스스로의 여집합으로서 부재한다.
<움직임의 사전>(2019)은 존재를 움직임으로 풀어낸다. 움직임, 곧 운동은 시간에 따라 대상의 공간적 위치가 변하는 것이다.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공간 좌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고로 정다희는 존재를 사유한다. 정다희의 애니메이션은 존재를 사유한다. 정다희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존재를 사유한다.
# 03. 사색
사유라는 단어는 정다희의 애니메이션에 다소 딱딱하게 들린다. 반면 사색이라는 단어는 다소 얕거나 약한 느낌이다. 그래서 보완해야 한다. 철학적 주제를 사색한다라고.
정다희는 사색한다. 정다희의 애니메이션은 사색한다. 정다희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색한다. 고로 존재한다.
# 04. 언어
정다희와 정다희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려면 언어를 세심하게 고르고 천천히 곱씹어야 한다. 정교함을 위해서가 아니다. 섬세함을 위해서이다.
2017년 4월, 정다희의 작품들을 전시, 상영하는 애니살롱 <나, 무의 시간>이 마련되었다. 개인적으로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글귀들이었다. 바슐라르를 비롯한 여러 글을 읽으며 정다희가 옮겨 적은 문장들. 그녀는 그러한 글들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밑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은 인용문들은 철학적 사변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창작을 싹 틔우고 꽃 피우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 과정과 결과물 속에 자신만의 사유 또한 담겨 있으리라.
*코기토 Cogito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래로, “생각하는 나”를 지칭한다. Incognito는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익명의, 무의식의”라는 뜻이다. Cogito Incognito는 문법적 정확성보다는, 운율을 살리려는 조합이다. <옷장 속 사람들>의 주된 모티프인 ‘지워진, 드러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서 Incognito를, 정다희의 사유/사색적 접근을 위해서 Cogito를 떠올렸다. 두 단어의 결합을 통해서 ‘부재에 대한 사유’, ‘사유하는 주체의 사라짐’ 등을 연상할 수 있을 테다. 이는 이 글 본문 중에 잠시 언급하는 2017년 애니살롱 첫 번째 참여 작가 정다희의 전시, 상영 제목인 <나, 무의 시간>과도 느슨하게 연결된, 또 다른 변주라고 할 수 있다.
# 05. 정다희의 유니버스
<옷장 속 사람들>에는 이전 작품들의 설정과 장면, 소품이 다시 등장하곤 한다. <의자 위의 남자>의 옷장이 그러하고, <빈방>의 실내가 그러하고, 인디애니페스트 2020 공식 트레일러 <Who aRe You?>의 거울 설정이 그러하다. 어쩌면 그 모든 작품들은 이미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안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세상의 단면을 각각의 작품에서 바라보았을 테고, 작품들이 쌓이면서 비로소 그것들에 부피와 규모와 시간대가 더해지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정다희의 유니버스가 점차 스스로를 드러낸다.
나뉘었던 시간과 공간이 결국 이어졌던 <나무의 시간>처럼,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 마냥 연결되었던 <의자 위의 남자>처럼, 부재가 곧 존재를 가리켰던 <빈방>처럼, 정다희의 유니버스에서 부분은 파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체를 가리킨다.
# 06. 할당된 공간
<옷장 속 사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다희 애니메이션의 총합인) 유니버스는 여러 단위의 세포처럼 제시된다. 옷장, 방, 아파트 각 세대, 아파트, 빌딩, 빌딩들 사이의 플라자... 나아가 구역, 도시,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마치 세포의 핵인 양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을 차지한다.
정다희는 이미 이러한 공간에 대해서 여러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를 테면 “이 방이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닐까?” (<의자 위의 남자>) 이때 방은 여럿의 ‘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내 안에 방이 들어오기도 한다. 질문은 형태를 바꾸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여기 그 방 안에 있다” (<빈방>) <빈방>의 오프닝에서 방은 벌거벗은 몸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이렇듯 공간과 존재는 함께 한다.**
**세포의 영어 단어 cell에는 ‘감옥’이라는 뜻도 있다. <빈방>에 나오는 “방은 나를 지켜주고, 나를 가둔다”라는 내레이션과 맞닿는 지점이다.
# 07. 지워진 존재
그런데 <옷장 속 사람들>은 과감하게 공간 속 존재를 지워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의 육체를 지워버린다. 정다희는 그렇게 우리에게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한다. 존재가 있는가? 존재가 없는가? 무엇을 근거로 있다/없다를 판단할 것인가?
어려운 게임은 아니다. 감독이 공연히 심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육체 대신 옷을 따라가면 된다. 다만 우리는 지워진 육체를 굳이 채워 넣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지 못할 뿐이다.
# 08. 마그리트
이 게임은 꽤나 익숙한 아티스트를 소환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애니메이터라면 언젠가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자신이 마치 마그리트가 된 양, 그러한 작품을 만들 생각도 해보았으리라.
육체를 생략한 채 걸쳐 입은 옷으로 인물을 다루는 <옷장 속 사람들>은 분명 마그리트의 그림들(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의 머리를 사과나 거울, 구름과 하늘로 대체하는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만으로 마그리트와 동기화할 수는 없다 (그런 어설픈 흉내는 현단계의 AI가 부리는 알량한 재주일 뿐이다).
# 09. 기호
마그리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접속하는 경로 중 하나는 ‘기호’이다. <옷장 속 사람들>은 이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우리는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패션 광고 문구에 그치는 얘기가 아니다. 옷은 우리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호이다.
그런데 <옷장 속 사람들>이 다루는 옷-기호는 단순한 지시나 대체,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네 마그리트를 멋지게 활용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 마그리트는 담배 파이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이미지 아래에 위와 같은 문구를 썼다. 파이프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파이프가 아니라고? 그렇다. 그것은 파이프 그림이지 파이프 자체가 아니다.
<옷장 속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게임도 그러하다. 옷이 정체성을 가리키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 옷이 그 사람을 대체하는가? (좀 더 직접적으로 묻자면) 그 옷이 그 사람인가? 이 질문은 지워진 자리에 기어이 얼굴과 몸통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우리의 관성적 태도에 태클을 건다.
# 10. 미끄러지는 기호
작품 속에서 옷은 완벽하게 육체를 대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종종 육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모자가 벗어날 때도 있고, 신발은 더 거칠게 저항하며 달아나기도 한다. 더구나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는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 내내 그녀는 자신에게 맞지 않은, 커다란 남성복을 입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이미 성별을 암시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옷장 속 사람들>은 “옷=사람”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듯 하지만, 종국에는 “옷≠사람”이라는 부등식을 보여준다. 몸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옷은 몸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이 설정에서 우리는 “기표 signifiant 와 기의 signifié의 미끄러짐”이라는 꽤 난해한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기호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기표와 기의가 결코 단단하게 맺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 11. 벌거벗은 임금님
“옷=사람”이라는 등식을 의심하기 위해서 <옷장 속 사람들>은 재미난 소동을 하나 끌어들인다. 많은 사람들, 아니 많은 옷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돌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가 들이닥친다. 아이의 표정은 해맑다. 반면 나머지 군중들은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무엇에 질겁하는 걸까? 옷을 입지 않은 것? 아니면 육체를 드러낸 것?
우리는 이 설정이 “벌거벗은 임금님 Emperor’s New Clothes”을 거꾸로 세운 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야기에서 임금은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옷’을 멋지다고 칭찬한다. 단 한 사람, 아이만이 ‘보이지 않는 옷’ 대신 ‘보이는 벌거벗은 몸’을 지적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무엇을 드러내고, 또 무엇을 감추는가?
# 12. 관계 속의 기호
이처럼 <옷장 속의 사람들>을 통해 정다희는 사유의 주제를 주체/존재에서부터 기호로 나아간다. 그리고 기호를 단지 상징이나 일대일 대응과 같은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러니까 구조주의적 기호학이나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 같은 입장을 따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유와 사색을 이론적 엄격함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창작은 논증이 아니다 (가끔 논증이 창작이 될 때가 있기는 하지만서도...).
# 13. 관계
기호를 관계 속에서 풀어나가려 하기에, <옷장 속 사람들>은 복수형을 취한다. 영어 제목은 Society of Clothes, 결국 관계는 ‘사회’와 등치 될 수 있다. 언뜻, 단수형이 적합할 것 같은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점을 보이는 듯싶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이 정말 단수의 인물을 다루었을까? 다시 보니 그 작품들도 결국 ‘관계’가 중심이었다. 관계에서 잘려 나가서 단수가 되었고, 단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계를 반추해 보았고, 관계를 이루던 사람들이 떠나서 텅 빈 상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움직임은 단수형일 때는 절대적 운동처럼 보이지만, 관계 속에서는 상대성을 갖게 된다.
# 14. 초현실주의, 100년 동안의 꿈
기호를 관계와 구조 속에서 다루려는 학문적 움직임이 일어날 무렵,*** 기호에 대한 의심, 또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흔들고자 하는 시도가 예술 쪽에서도 있었다. 바로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도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 <옷장 속 사람들>이 발표된 2024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1924년 앙드레 부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과 함께 현실과 상상의 위상이 재점검되었다.
4년 뒤인 1928년, 한스 리히터는 <Ghosts Before Breakfast>에서 육신 없이 중절모 네 개가 붕붕 떠다니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초현실주의 영화로, 아방가르드 영화로, 실험 영화로, 예술 영화로, 간혹 애니메이션으로 구분되곤 한다. 물론 애니메이션은 자신의 초기 역사 때부터 이미 몸뚱이 없이도 모자나 옷, 물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장면을 줄곧 만들어냈다.
*** 이 시기를 명확히 짚기는 어렵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과 기호학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였고, 이를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내세울 때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포스트-구조주의까지 다루자면 1980년대 이후까지 아울러야 한다.
# 15. Incognito
초현실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익명의’ 등등의 형용사를 늘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형용사의 결집체가 바로 ‘무의식’, 즉 드러나지 않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는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옷장 속 사람들>은 무의식과 의식 (또는 인식, 아니면 이성, 혹은 사유, 어쩌면 주체)의 관계를 좇는 이야기일까? 물론, 가능한 접근법 중 하나일 테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다루었듯이,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을 통해 (드러난) 의식이 남겨놓은 여백을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이 수미상관으로 짜인 구조는 흥미롭다. 옷장에서 시작하여 아파트 건물로 확장한 오프닝은 아파트 건물로부터 옷장으로 귀결한다. 시간상으로는 오전 8시에 시작하여 오후 8시에 종료한다. 그러면 우리는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의 상황을 가늠하게 된다.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머무는 시공간에서 옷은 필요할까? 옷장 속에 옷을 걸어둔 채, 비로소 자신의 육신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은 잠의 시공간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의식을 위한 무대 속으로.
정다희는 사유, 사색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