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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Pig that Survived Foot-and-Mouth Disease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Pig that Survived Foot-and-Mouth Disease | 2024 | 105mins | dir. 허범욱 HUR Bumwook


반인반수회의록, 이것이 인간인가?


경고! 불친절한 범욱 씨 

허범욱은 친절하지 않다.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건 창작자로서 도발적인 말 걸기 전략일 수 있다. 관객은 도발에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친절하지 않은 도발을 통해 새로운 경험으로 함께 나아갈 수도 있고, 자멸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어쨌든 관객에게 불친절한 도발이 작동하려면 관객이 긁혀야 한다. 


그런데 허범욱은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에게도 친절하지 않다. 이 말은 자신이 만드는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규범과 관성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애니메이션에 요구되는 기대치를 따라서 관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적절히 밀당을 하면서 자신의 애니메이션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어필하는 셈법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애니메이션은 쉽게 그다음 장면을 예측하기 힘들다. 정확히는 그 예측을 의도적으로 부수고자 한다. 따라서 그에게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뒤틀리고 뒤집히고 어긋나고 벗어나고 달아나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허범욱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친절하지 않다.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하여 사서 고생하는 시도를 한다. 경제적으로, 제작 기술적으로, 미적으로 분명히 조금 더 안정적이거나 안락한 선택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혹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일부러 고행의 강도를 높이려는 듯 군다. 


문제는 이 모든 불친절함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객과 애니메이션과 자기 자신을 하나의 사슬로 묶고는 불구덩이 속으로 냅다 뛰어드는 무모함. 누군가는 튕겨 나갈 테다. 자명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다다를 테다. 예측할 수 없는 난관을 뚫고 마지막에 이르면 여타의 애니메이션에서 맛볼 수 없던 무언가를 비로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달콤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장 쓰거나 고약한 맛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점을 허범욱은 약속한다.


마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작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시작한다. 작품 초반을 채우면서 지배하는 강렬한 분홍빛을 감내할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컬러. 아름다움과는 결코 결부시킬 수 없는 색감은 라이브 액션에서도 흔히 접하기 어려운 컬러 값이다. 사실적인 것의 허용치를 넘어선, 지극히 표현적인-원초, 말초, 퇴폐, 관능, 권태, 염세, 가학, 피학, 엽기 등등이 뒤엉킨-자극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날것 그대로의 살, 이내 썩고 문드러질 피부와 근육, 날카로운 것에 베이고 거친 것에 긁혀 나갈 살갗,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에서 수축되고 이완될 거죽, 그 아래에서 아직 온기를 지니지만 죽음과 함께 급속히 식어버릴 혈관, 그 안에 가득 찬 혈액, 상처 사이로 배어 나오거나 별안간 솟구칠 피, 극도의 흥분과 불안으로 동요하는 동공, 충혈된 눈을 당장에라도 터뜨릴 듯 달아오르는 안구의 실핏줄... 이 모든 것이 응집된 색이 바로 분홍,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의 오프닝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컬러이다. 


그로부터 어떠한 미적 반응을 떠올리기도 전에 폭력, 잔혹, 무자비, 살처분, 죽음, 공포가 우리를 덮친다. 판단의 무방비 상태에서 비릿함, 시큼함, 뜨끈함, 끈적함, 묵직함, 뭉근함, 퀴퀴함, 오싹함, 메스꺼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각이 온몸을 훑으며 달라붙는다. 꾸웨엑 대는 수많은 돼지의 울부짖음과 비명, 그것을 덮어버리는 중장비 소음이 귀를 찌르고 뚫는다. 


이것이 이 작품의 충격적인 오프닝이다.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히는 돼지들처럼, 관객들도 제대로 된 판단과 대처를 할 겨를 없이 그 상황 속에 휩쓸린다. 정면을 향한 돼지의 두 눈이 우리를 응시한다. “당신들이라고 이 상황에서 다를 바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더 이상의 끔찍함과 참담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떠나도 좋다. 그리하도록 감독은 관객을 부추길 것이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제목은 이 돼지가 지금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 일러둔다. 안도감보다는 오싹함이 전해진다. 하지만 돼지의 귀환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폭력의 현장으로 이끌려 간다. 이번에는 군대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더 끔찍할 수 있다. 우리가 구제역 살처분에 대해서 뉴스로 접하면서도 생매장당하는 돼지의 경험을 직접 상상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병영 내 가혹행위의 경우, 누군가는 이미 (피해자로, 가해자로, 방관자로) 경험했거나, 여러 방식으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비단 군대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또는 직장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폭력을 한번 더 바라보게 된다. 잔혹함과 무자비함의 강도가 구제역 살처분에 비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경험적 차원과 맞닿아 있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곳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이며, 기실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혹행위의 정도가 얼차려 수준이 아닌, 린치와 고문에 다름없다는 점을 확인한다. 감독은 그 폭력을 다시 한번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정말로 이 작품을 끝까지 볼 작정인지, 관객에게 확인하듯이 말이다.


스크린 위에서 일말의 동정이나 자비 없이 펼쳐지는 두 개의 폭력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작품 속 지옥도로 뛰어들 결단을 하였는가? 그렇다면 이 작품만이 선사할 수 있는 초반 15분(정확히 15분이라 특정할 수는 없다. 16분 또는 17분, 그 언저리 어딘가 일 수 있다.)의 압도감을 즐길 자격이 있다. 탈출한 돼지 H와 탈영한 군인 최정석은 양극단에서 대칭을 이루며 하나의 접점을 향해 질주하는 듯하다. 마치 마주 보고 달려드는 폭주 기관차의 기세처럼. 살아남기 위해서는 “완벽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돼지 H, 그리고 지긋지긋한 인간의 삶을 부정하고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 되고자 하는 인간 최정석. 우리는 이 둘의 출발점이 어떠했는지, 탈출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목격했다. 양쪽의 대비되는 대칭에 수긍하고, 그들이 정반대 쪽을 향해 내달리는 질주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다 보면 내심 이 둘의 수렴점을 예상하고 기대하게 된다. ‘인간화하(려)는 돼지와 돼지화하(려)는 인간이 만나는 접점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이렇듯 작품 전반부 15분에 이르는 동안, 작품으로부터 튕겨 나가지 않은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게 어느새 작품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무엇이 인간이란 말인가?

15분은 멈춤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사건은 대칭을 이루며 교차한다. 생매장으로부터 탈출, 살인으로 인한 탈영, 인간으로 변화, 짐승으로 변화... 대칭은 교차 편집을 통해 한 곳으로 수렴해 나간다. 이는 단지 은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실제로 돼지 H와 군인 최정석은 각자의 탈출 경로를 따라 동일한 하나의 숲으로 다가간다. 


허범욱은 이러한 15분을 정교한 구조 속에 배치하였다. 마치 두 대의 롤러코스터 열차가 각자의 출발점에서부터 저마다 곡예 주행을 거치며 점차 가속도를 붙여가다가 결국 하나의 레일 위에서 부딪치게끔 설계한 것처럼. 처음부터 강렬한 상황으로 급습하여 우리를 당혹게 하고는, 이내 이들의 탈출을 정당화하고 응원하게 이끌었으며, 짐승이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관전하도록 하였고, 종국에는 둘 사이의 접점-반인반수의 형태적 균형점이면서도 숲이라는 장소적 교차점-을 기대하게 유도하였다. 


전속력으로 정면 충돌하는 두 주인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며, 그 충돌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인지가 관심사로 달아오른다. 허범욱의 선택은? 훗, 감독은 갑자기 선로를 바꾼다. 정면충돌은 없다. 두 열차는 각자의 레일 위로 달릴 뿐이다. 관객은 충돌이 잠시 지연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한 호흡 뒤에 일어날 것이라고, 아니면 최종 장면에서 대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계속 기대를 유예한다. 우리는 15분의 속도감이 끝까지 유지되기를, 혹은 더욱 불어나는 가속도를 따라 폭주하기를 기대하지만, 감독은 거부한다.


선로를 변경한다는 안내 방송은 없다. 말했잖나, 허범욱은 친절하지 않다고. 관객에게, 애니메이션에게, 감독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다고. 친절하게 기대에 부응하면서 원하는 충돌을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은 장르의 규칙에 포섭되었을 것이다. 그런 전략이 나쁠 것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성공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애초에 허범욱은 두 주인공을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관객이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에 대해 몰랐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할 얘기는 따로 있었다. 


예상 경로를 갑자기 틀어버린다는 것은 작품 전체의 구조를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초반 15분, 그리고 나머지 90분으로 불균형하게 나뉜다. 1/7과 6/7, 즉 1:6이라는 비대칭 구도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분량의 비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밀도 또는 에너지 총량으로 재환산해야 한다. 15분이 강렬했다면, 밀도가 빽빽하고 에너지가 넘쳐났다는 얘기다. 그 정도의 밀도와 에너지로 나머지 90분을 채운다면 장편 애니메이션은 (마찬가지로 장편 라이브 액션일지라도) 버거움 때문에 폭발하고 말 것이다. 장편의 분량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 조절, 완급 조절이다. 우리는 결코 그 시간 동안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긴장과 몰입을 유지할 수 없다. 이완과 숨 고르기는 필수이다. 


초반 15분에 응집된 에너지를 나머지 90분에 배분하는 것, 다만 허범욱은 일련의 장편 플롯 공식을 거부한다. 15분이 사건의 시간이었다면, 이후 90분은 대화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이야기의 성격과 결, 속도와 온도,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난 15분을 감내하며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선 관객을 다시 한번 시험에 들게 한다. 시험 문제는 하나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90분을 채우는 대사는 흡사 ‘인간’을 주제로 한 변증술과도 같다. 그렇다고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말씀’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감독은 구조를 설계한다. 여전히 돼지 H와 인간 최정석은 각자의 궤도를 운행하고 있다. 이들은 완전한 인간/짐승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길을 나선 ‘구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여기에 추가되는 것은 동료이다. 순례길에서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전형적인 설정처럼 보이지만, 누구를 만날 것인가를 두고 감독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다른 멧돼지 무리,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멸로 가득한 또 한 명의 인간 지은. 


돼지 H와 인간 최정석의 길동무는 누가 되어야 할까? 돼지가 되어 가는 인간 최정석이 이 멧돼지를 만나고, 인간이 되어가는 돼지 H가 절망적인 인간 지은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이를 통해 두 개의 수렴점을 추가로 파생시킬 수 있을 테다. 그리하면 이 중간 단계의 수렴을 거쳐서 최종 단계의 완성형 수렴점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허범욱은 수렴 자체를 거부한다. 돼지는 돼지를 만나고, 인간은 인간을 만난다. 돼지와 인간 사이의 이종 결합 대신, 돼지의 무리와 인간의 무리가 따로따로 각자 증식한다. 새롭게 형성된 관계는 사건을 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상태를 고양, 강화하는 방향으로 서사를 진행시킨다. 이를 통해 돼지들의 분노가 결집하고, 인간들의 좌절이 결합한다.


재편된 90분 역시도 양쪽을 교차 편집하며 대칭적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하지만 서로의 양태는 대비된다. 우선 돼지들은 추앙으로 시작하여 토론, 논쟁을 거쳐 내분으로 나아간다. 얼핏 보기에는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일어나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화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어리석은 이들의 우매한 생각들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진지하다. 간절하고 절박하다. 그렇지만 어리석다.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은 돼지이다. 그것이 한계이다. 돼지에게도 경험에 기반한 나름대로의 지혜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성은 인간의 능력이다. 감독은 한계를 뛰어넘는 이성적 도약을 돼지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돼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간이 되려는 시도는 인간의 외양을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문다. 가면을 쓰는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품고 벼랑 끝까지 가려는 인간들도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토론이나 논쟁이 아니다. 자기 고백과 적절한 침묵, 경청이 중심을 이룬다. 어설픈 희망이나 위로 따위는 사치이다. 그런 것은 믿지도 않는다. 다만 상대를 앞에 두고 거기에 어울리는 말을 꺼내고, 상대의 말을 기꺼이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쁜 인간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좋은 인간을 통해 그나마 아픔을 줄일 수 있다.

이처럼 돼지 무리와 인간들 간에는 분명한 차이와 간극이 있다. 수렴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각이 인간의 종적 우월함으로 귀결되고 말 것인가? 돼지와 인간의 대비는 그렇게 단순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다. 우리가 90분 동안 경험하는 것은 질료(hyle)와 형상(eidos)을 둘러싼 서양 철학의 오랜 숙고, 즉 존재론이다. 돼지가 사람 흉내를 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질료를 형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형상을 질료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인간은 무너져 버린 형상, 부패한 질료 속에서 인간성이라는 존재론적 본질을 발견한다. 허범욱은 이 차이를 철학자의 말투가 아닌, 잔혹한 우화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그러하기에 그에게는 15분의 압축된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90분이다.


스스로 존재 형식이 된 애니메이션

돼지 H와 인간 최정석은 숲에서 만나지 못한다 (스포 조심!). 숲은 결코 탈출과 해방, 완성을 약속할 수 없는 장소이다. 겉보기에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멧돼지 사냥용 올무와 덫이 도처에 있고, 깊숙한 곳에는 스스로 목매단 사람들이 즐비하다. 유괴, 살해된 시신을 암매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혹여 끝까지 일말의 희망과 새로운 삶을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허범욱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고 다시 한번 말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서 길을 잃었는가? 또는 감독은 우리를 숲으로 꾀어내고는 나 몰라라 손을 뗐는가? 그렇지는 않다. 허범욱은 적당한 타협과 수렴의 엔딩을 선사하는 대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이한다. 돼지 H와 인간 최정석, 나아가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나’를 이루는 여러 모습일 것이라고, 저들이 모두 ‘나’ 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제야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작품이 상영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동조자와 비판자, 추종자와 배신자 사이를 바쁘게 옮겨 다녔을 것이다. 친절하지 않기에 가능한 불편함이다. 


기실, 하나의 ‘나’와 여럿의 ‘나’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가 만들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계산식이기도 하다. 돼지 H와 최정석의 목소리는 동일한 성우(남도형!)가 담당하였다.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한 명의 연기자(한우진!!)에 의해 구현되었다. 연기자가 다양한 캐릭터에 맞춰서 하나씩 움직임을 연기하고, 이를 ‘모션 캡처’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대략 100년 전에 로토스코핑 기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션 캡처는 애니메이션에서 질료와 형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끔 한다. 캐릭터가 연기자를 흉내 내는 것인가, 아니면 연기자가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인가? 이 물음은 마치 멧돼지들이 인간의 형체를 뒤집어쓰고 인간인 척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모션 캡처 기법은 궁극적으로 영화에서 인간 배우를 지우고자 한다. 그래서 라이브 액션은 모션 캡처를 특수 효과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려 애를 쓴다. 애니메이션은 바로 그 특수 효과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의 역사를 갈래 쳐서 발전하였다. 애니메이션은 인간 배우가 불필요했다 (가끔은 깜짝 등장하기도 하지만...). 모션 캡처가 영화 제작을 지배하는 순간, 영화는 더욱더 애니메이션과 닮아갈 것이다. 애니메이션 또한 모션 캡처를 통해 다시 인간 배우를 움직임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자신의 방식을 따라 라이브 액션으로 향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에서 접점이나 충돌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종종 그러하리라는 예언자들이 테크노 방언으로 현혹하기도 한다. 100년 전에도, 지금에도 말이다). 하지만 맞은편을 향해 달려갈수록 질문은 자신을 향하게 된다. 라이브 액션이란 무엇인가,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영화란, 시네마란 무엇인가?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불친절하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고, 라이브 액션과도 차별화된 분위기와 질감을 잔뜩 투척하면서 말이다. 충격파를 감내해 낸다면, 그리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면 “살아 돌아온다”라는 말과 “인간답게 산다”라는 말의 무게를 제대로 겪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먼저 부딪쳐낸 자, 바로 감독 자신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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