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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Oh Jjangddung

짱뚱이네 똥황토  Oh! Jjangddung | 2024 | 26mins 5secs | dir. 박재범 PARK Jaebeom | prod. Studio Yona


점을 이으면 선, 선을 이으면 면, 만나고 어긋나고 겹쳐지다

저 멀리 툰드라를 배경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장편 이야기를 만들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의 땅>은 하나의 커다란 목적지였다. 이를 테면 무엇인가를 완성하거나 매듭짓는 의미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았다. 허나 중요한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해서 여행이 끝나는 건 아니다. 마침표를 찍었다고 해서 더 이상 쓸 얘기가 없는 게 아닌 것처럼.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성취감에 차올라 이제까지의 힘든 여정에서 보상을 찾을 수도 있고, 그만큼이나 아쉬움을 달래며 지난한 과정을 복기할 수도 있다. 이 양가적 감정이 뒤엉키는 가운데 그다음 목적지를 찾으며, 새롭게 길을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짱뚱이네 똥황토>는 그리 멀리 가지 않는다. 바다도, 사막도, 툰드라도 아닌, 바로 이 부근이다 (짱뚱이의 말을 빌자면, 전라북도 장수). 물론 ‘이곳’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우리가 거주하는 도시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리적 경로로 보자면 가까워졌지만, 시간대로 보자면 여전히 떨어져 있다 (인트로에서 1973년 4월 10일로 시기를 밝힌다). 이러한 설정을 먼 여정으로부터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목적지-경로에서의 ‘어긋남’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작품은 귀환과 어긋남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 둘이 겹쳐지는 지점을 다루고 있다. 물론 ‘겹침’은 완벽하게 포개어지는 합일 상태를 일컫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원작 『짱뚱이네 집 똥황토』와 애니메이션 <짱뚱이네 똥황토>는 함께하는 교집합만큼이나, 각자의 여집합을 지닌다. 그리고 원작은 작가 오진희의 ‘실제’ 삶과 작품 속 짱뚱이의 ‘허구’ 이야기 사이에서 적절히 겹친다.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짱뚱이네 똥황토>는 1970년대 초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감독 박재범의 어린 시절과는 시차가 있지만, 박재범이 학생일 때 원작 『짱뚱이네 집 똥황토』가 발표되어 독자-텍스트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973년 무렵의 삶은 2006년에 책으로, 그리고 2006년의 책은 2024년의 애니메이션으로, 매체라는 몸을 바꾸면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원작은 원작대로 시리즈 속에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전까지 시리즈는 오진희 작가의 글에 남편 신영식 만화가의 그림이 만난 만화책으로 선보였지만, 2006년 신영식이 세상을 떠나면서 『짱뚱이네 집 똥황토』는 그가 남긴 그림들과 함께 동화책으로 출간되었다).


장뚱이와 똥황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 이야기는 재구성된다. 이전 짱뚱이 시리즈로부터 동생 진욱이의 상황을 가져오고, 똥황토를 낳은 어미 개 조남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새롭게 각색되었다. 이를 통해 이야기는 두 개의 평행한 부모-자식 관계로 재편된다. 하나는 몸이 불편한 진욱이를 돌보는 짱뚱이의 부모, 또 하나는 똥황토를 포함한 여섯 마리 새끼를 낳은 조남이 (그리고 부재 속에서 언급되는 똥황토의 아비, 사냥개 장군이). 짱뚱이는 이 두 관계 가운데에서 진욱이와 똥황토를 돌보는 (때론 돌보아야 하는) 중심점(이자 접점)이다. 평행하게 흐를 것 같은 두 관계는 초반에 갑자기 무너진다. 원작에 없던 사건, 즉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경 온 짱뚱이 친구들의 짓궂은 행동 때문에 조남이가 한껏 예민해지면서 이야기는 원작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방향으로 확장해 나간다. 말하자면 짱뚱이의 친구들은 초대받지 못한 경유지가 되고, 그래서 예정된 경로에서 엇나간 것이다. 이러한 궤도 이탈은 짱뚱이와 똥황토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원작에서 똥황토의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짱뚱이의 친구들에 의해서 초기 원인이 발생하고 이로부터 연쇄작용이 일어나버렸다. 짱뚱이에게 일종의 귀책사유가 얹혀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완전히 망쳐지는 건 아니다. 모든 게 충실한 빌드업 과정이다. 그러니까 <짱뚱이네 똥황토>는 원작으로부터 캐릭터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이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짜낸다. 즉 캐릭터들은 각기 하나의 점이 되고, 이 점들을 연결하면서 선을 잇는다. 선은 관계가 된다. 그리고 선들이 교차하고 엇나가면서 사건을 이룬다. 따라서 사건은 관계라는 선으로 직조된 면이 된다. 이러한 설정이 도드라지는 지점이 바로 ‘마법에 걸린 공주’ 진욱이의 환상 씬이다. 짱뚱이와 봉식이는 진욱이를 위해서 기꺼이 장군이 되고 개구리 왕자가 된다. 그리고 마법의 저주로부터 진욱이의 불편한 몸을 구해내고자 한다. 진욱이를 자유롭게 내달리게 할 수 있는 건 똥황토의 몫이다. 이를 위해 진욱이와 똥황토, 별개의 두 점이 하나로 포개어진다. 똥황토 위에 올라탄 진욱이가 난생처음 신나게 달린다. 이 사건의 무대는 엄마가 결혼 때부터 간직해 온 옷감 위에서 펼쳐진다. 결혼 예단으로 함에 고이 담겨왔고, 훗날 두 딸의 치맛감으로 쓰기 위해 서랍장 속에 간직했던 고운 옷감은 이제껏 제대로 펼쳐진 적이 없었는데, 진욱이를 위한 환상극 무대에서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환상의 핵심은 불편한 진욱이가 있는 이곳에서 마법을 깨우는 샘이 있는 저곳까지 가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두 점 사이의 연결이 첫 번째로는 똥황토와의 접점을 통해, 두 번째로는 펼친 옷감의 면을 통해 잠시 성취되는 것이다.


환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단순히 꿈에서 깨는 식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환상에서 현실로 넘어올 때, 진욱이는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아이들이 놀다가 벌어진 해프닝일 수도 있겠지만, 불편한 진욱이를 바라보는 부모 입장에서는 큰 사달이 날 법한 셈이다. 그저 진욱이와 똥황토가 분리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짱뚱이로서는 미안함 때문에 진욱이에게 다가가기 어려워지고, 굳이 이 사고 때문은 아니지만 똥황토마저 (언젠가는, 결국)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점들은 다시 멀어진다.


이야기는 각각의 캐릭터, 점들이 저마다의 예정지로 향하는 식으로 흘러간다. 똥황토는 사냥꾼 아저씨와 아비 개 장군이에게로 보내진다. 진욱이는 똥황토 대신 휠체어를 타고 방 밖을 나가 마당으로, 마을로, 그리고 학교로 (그리고 한참 후에는 더 큰 꿈을 향해) 점차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각 점이 자신만의 방향으로 연장선을 그어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지만, 감독은 한 번 더 선의 경로를 수정한다. 바로 똥황토의 귀환. 원작과 다른 전개이다. 그리고 <짱뚱이네 똥황토>에서 비로소 허용된 유일한 곡선이다.


이러한 귀환의 곡선을 흔한 동화 속 해피엔딩 이라 불러야 할까? 이야기 막바지에서 U턴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감독은 많은 고민을 했을 테다. 그리고 그 고민의 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출발점을 다시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야기는 원작과 차별화하기 위해 짱뚱이의 부모/똥황토의 어미 개 조남이라는 평행 관계를 설정하면서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엔딩의 차별화에는 또 하나의 부모 입장이 포개졌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갓 부모가 된 박재범, 이윤지의 시선. 작품 속에는 ‘부모’의 태도, 심정, 고민, 선택에 관한 대사가 줄곧 등장한다. 새끼를 희생시킨 조남이의 의도, 진욱이의 회복을 기원하는 정성, 똥황토를 보내야 했던 까닭 등등. 여기에 바람이와 똥황토가 자신들의 자식이라며 기뻐하다가 돌연 묘한 분위기에 휩싸이는 봉식이와 짱뚱이의 모습까지. 겉으로는 짱뚱이와 똥황토가 주인공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부모의 입장에서 새롭게 써내려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진욱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 안일하게 접근했다면 진욱이는 자칫 작품 내내 안타까움과 측은함, 동정과 애틋함만으로 다뤄지다가 마지막에 뜬금없이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진욱이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갔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서 원작자뿐만 아니라 짱뚱이 자매의 아버지까지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당사자 가족들이 진욱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는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놓칠 수 있는 지점이다.


<짱뚱이네 똥황토>는 원작자의 어린 시절을 어른-부모가 된 후 만들어낸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를 감독이 어렸을 때 접한 후, 어른-부모가 된 직후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그땐 그랬지”라는 노스탤지어에 만족하지 않는다. 스케일은 바뀌었을지언정 디테일에 있어서는 타협이나 양보 따위는 없다. 4월 봄날에서 시작하여 한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이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은 나뭇잎의 색깔과 들녘의 모습을 통해 더할 나위 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냈다. 제작진과 작업 여건의 변동은 있었지만, 등잔불과 백열전구가 공존하는 당시의 실내 불빛뿐만 아니라, 똥황토가 떠난 직후 휑한 방 안을 짱뚱이의 커다란 그림자로 채우는 탁월한 조명 활용술도 여전하다. 모자로 접어 만든 신문지의 시대적 디테일, 전화기가 놓여 있는 탁자의 문고리에 자물쇠 대신 끼워 넣은 숟가락까지, 고증의 섬세함은 현기증까지 자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완성도는 캐릭터-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쉼 없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 부모가 되는 것, 더 나은 어른이 되는 것, 어느 하나 쉽지 않지만 이것들이 하나의 작품 속에 겹쳐질 때, 우리 안에서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울림이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봄날, 들녘을 쓸며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 말이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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