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Motherland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Motherland | 2022 | 68mins 45secs | dir. 박재범 PARK Jaebeom | Prod. Studio Yona
풍경과 퍼펫의 이중주, 살아있음을 연주하다
박재범의 필모그래피를 펼쳐 놓으면 무엇인가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더미: 노 웨이 아웃> (2015), <빅 피쉬> (2017), <스네일 맨> (2019),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2022), 여기에 이윤지와의 공동 감독작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 (2021)을 추가할 수도 있겠다. 특정한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도 있고, 어떤 논리나 질서를 포착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박재범의 필모그래피는 꽤 정돈된 하나의 궤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이하 <엄마의 땅>)을 그 궤적 위에 배치하면, 마치 이 작품만을 위한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을 거라 받아들일 수도 (어쩌면 받아들여야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엄마의 땅>은 온전한 신화적 서사를 완성하게끔 예정되어 있으며, 나아가 주인공 그리샤의 성장이 감독 박재범의 성장과 겹쳐진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정말 모든 것은 철저히 예정된 계획 (말하자면 ‘운명’)을 따른 것일까?
대학 전공 졸업작품 (<더미: 노 웨이 아웃>),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개인 프로젝트 (<빅 피쉬>), 한국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 과정에서의 작품 (<스네일 맨>), 아카데미 장편 과정에서의 작품(<엄마의 땅>)… 애니메이션을 배우고 익히고 심화시키는 각 단계를 거치면서 작품들은 길이가 점점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스케일도 넓어졌다 (그리고 ‘여기, 이곳’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진 장소로 향했다). 작품의 시공간적 확장은 박재범이 스스로 ‘감독’이 되어가기 위해 걸어가는 성장 드라마로 읽히기도 하다. 현재 그는 스튜디오 요나의 대표 겸 감독이자,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애니메이션 전공 교수이며, (이 글을 쓰는 2024년 7월 기준) 갓 돌이 지난 사랑스러운 딸의 아빠이다. 이러한 중첩된 포지션을 필모그래피의 확장과 맞물려 놓으면 정말로 박재범을 ‘성장캐’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모든 단계를 정석대로 “따박따박” 정확히 밟아 나가는 모범 답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결코 감독 박재범도, 그의 장편 애니메이션 <엄마의 땅>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엄마의 땅>은 신화적 토대에서 이루어지는 판타지 장르 작품이다. 기후적으로는 툰드라, 지리적으로는 시베리아, 문화적으로는 (가상의) 예이츠 부족의 유목 생활권을 배경으로 삼는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신화 중에서도 모성의 헤리티지를 부각시킬 것이다. <엄마의 땅>이라는 제목은 부제목 <그리샤와 숲의 주인>과 절묘히 조합을 이룬다. 엄마와 그리샤, 땅과 숲은 서로 대구를 만들고, 엄마-그리샤-숲의 주인 사이에 긴밀한 연결 고리를 암시하기도 하며, {엄마의 땅=숲}, {숲의 주인=그리샤}라는 계승의 정통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제법 익숙한 신화적 서사 전통이다. 자연스레 몇 가지 사건과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모성적 질서는 흔들릴 것이며, 환란을 야기하는 주범은 모성 반대편으로부터 나타날 터이고, 주인공은 고난을 거쳐 마침내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의 역경을 통하여 성장하리라. 정답이다.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계승해 온 스토리텔링의 정석이다. 물론 정석에는 다양한 변주가 첨가되곤 한다. 빌런이 얼마나 악한지, 혹은 매력적인지, 주인공의 여정과 귀환에서 원하는 것은 얻었는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는지 등등...
<엄마의 땅>을 주인공 그리샤에 초점을 맞추어 따라가면 무난하지만 살짝 밋밋하다. 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연방군 블라디미르에게서 빌런의 매력을 찾기에는 그의 설정이 다소 평면적이다. 블라디미르는 조금 더 ‘못돼 처먹어야 했고’, ‘그럴 만한 나름의 사정’ 정도는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어야 하는 사람은 바자크라고 할 수 있다. 예이츠 부족이면서도 연방군 블라디미르의 앞장이 노릇을 하는 인물 말이다. 어째서 출신 부족을 등져야 했고, 그런 자가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자기 내면의 갈등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다가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던가, 또는 그 어떤 쪽(혹은 양쪽)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하는 역할 등등, 바자크가 해낼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딱한 사정은 “아내와 아이가 죽었다” 정도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겪은 비극 속에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은 숲의 주인을 원망하며 총을 겨누지만, 우리는 바자크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엄마의 땅>에 추가 시간 10분이 주어져야 한다면, 상당 부분은 바자크를 위한 몫이어야 할 것이다. 러닝타임 68분은 짧았다).
이처럼 <엄마의 땅>을 이야기 중심으로, 그리고 주요 인물 중심으로 따라간다면 우리는 그저 주어진 운명에 따라 고난을 겪고, 그리고는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역할을 깨닫는 그리샤를 확인하면서 마무리할 것이다 (감동의 분량은 각자의 취향에 달려 있다). 그러면서 첫 장편을 무사히 (그리고 무난하게) 마친 박재범에게 적절한 축하와 격려와 응원의 말을 전할 테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리샤의 여정과 박재범의 필모그래피/커리어를 하나의 ‘성장 드라마’로 오버랩시키면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따박따박” 정석 플레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의 땅>과 박재범은 주인공-캐릭터의 관계가 아니다. 즉 그리샤를 박재범의 페르소나로 포개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제목을 찬찬히 확인해 보자,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엄마? 그리샤? 숲의 주인 (붉은 곰)? 아니면 엄마의 땅? 숲? 그렇다, 시선을 사람에서 주변으로 옮기면 비로소 이 작품에서 거대한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때론 눈보라로, 눈 덮인 대지로, 얼어붙은 호수와 강으로, 꿀렁거리는 늪지로, 가파른 절벽으로, 울창한 숲으로, 깊은 동굴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밝은 달빛으로, 달을 가로지르는 구름으로, 환상적인 오로라로, 장면마다 적절히 바뀌면서도 묵묵히 작품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는 그저 ‘자연의 위대함’을 말하는 수사적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박재범은 이 모든 자연의 모습을 꼼꼼히, 정성껏, 섬세하게, 매 프레임마다 애니메이팅 해낸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할 때뿐만 아니라, 때론 일렁이는 불빛, 불빛을 반사하는 눈밭과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바람이 쓸고 가는 털과 머리카락, 잔잔한 물결, 떨어지는 물줄기 등이 화면의 귀퉁이를 차지하거나, 아웃 포커싱으로 흐려진 뒷배경에서 마저도 부단히 움직인다. 이를 단지 ‘사실주의의 추구’라든가, ‘테크닉에 대한 탐닉’이라고 평가한다면, 여전히 헛다리를 짚는 격이다. <엄마의 땅>에서 애니메이터의 손끝이 닿은 장면을 3D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다룬다고 상상해 본다면, 비로소 스톱모션 본연의 ‘참 맛’이 혀 끝에서, 무엇보다 손 끝에서 느껴질 테다.
<엄마의 땅>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부득이 박재범의 첫 작품 <더미: 노 웨이 아웃> (이하 <더미>)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기꺼이 말이다. 차량 충돌 실험용 더미 인형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장소인 실험장에서 탈출하는 시도를 다룬 이 작품에는 향후 박재범이 애니메이션에서 줄기차게 천착할 두 중심축이 또렷이 담겨 있다. 하나는 풍경, 다른 하나는 퍼펫. 풍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자면, 가로 폭이 아주 긴 (반대로 말하자면 세로 높이가 아주 낮은) 직사각형 창문만이 바깥세상을 보여준다. 이 제한된 틈새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밖에 없다. 더미 커플이 탈출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에는 더 이상의 바깥 풍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새가 주는 인상은 아주 강렬하다. 우리는 아마도 각자의 열망을 따라 틈새 너머의 세상을 그려볼 것이다. 어쩌면 실험장 바깥세상은 더 끔찍할 수도 있고, 더 황량할 수도 있을 테다. <빅 피쉬>의 바다가 그러했고, <스네일 맨>의 사막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만 박재범은 바다, 사막, 그리고 툰드라의 대지가 그저 배경에 그치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바다의 파도는 무엇이든 삼켜버릴 듯 포효해야 했고, 사막의 모래는 끊임없이 여정을 지우고 흐트러뜨리며 모습을 바꿔야 했고, 툰드라의 자연은 스스로의 호흡과 생명을 보여줘야 했다. 다시 말해, 박재범에게 장소와 풍경은 그저 고정 불변의 세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촬영 프레임마다 움직여야 하는 커다란 스케일의 애니메이팅 오브제이자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축인 퍼펫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서 애니메이팅의 대상이자 스토리 속 움직임 주체는 분명 퍼펫이다. 그런데 <더미>에서 퍼펫은 실험용 더미이고, 그 용도는 충돌 충격 측정이며, 최종 종착점은 파괴, 폐기이다. 그러니까 더미는 애초에 인간을 대신하면서도, 인간의 생명이 아닌 인간의 죽음을 떠안아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더미가 생존의 욕구를 지닌다는 건 자기 운명 (용도)의 부정과도 같으며 (아담은 파괴된 이브를 기꺼이 거두어 자신 옆에 앉힌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퍼펫에 구현해야 했다. 다시 말해 <더미>는 퍼펫을 인간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면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또는 인간 너머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애니메이팅 설정을 따라야 했다. 즉 인간을 흉내 내는 퍼펫이 아니라, 퍼펫 자체로서의 애니메이팅을 시도해야 했다. 뭔가 그럴싸하게 이름 붙이자면 ‘퍼펫의 존재론’ 같은 말일 텐데, 이후 작품인 <빅 피쉬>에서 퍼펫들은 죽음을 경계로 헤어져야 했고, <스네일 맨>에서 퍼펫들은 죽음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와 같았다. 그래서 <빅 피쉬>와 <스네일 맨>은 인간의 모습을 한 퍼펫이면서도 언제든 죽음에 잠식될 수 있는, 마치 더미의 숙명을 떠안은 실존적 상황에 놓인다. <엄마의 땅> 역시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설정을 유지하지만, 이 작품에서 퍼펫은 새로운 형태를 지닌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한층 사실적인 외양을 지니면서도, 입 주변은 리플레이스먼트(replacements: 퍼펫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한 입 모양을 만들어 놓고, 대사에 따라 필요한 모양을 갈아 끼우는 세팅)의 절개선을 고스란히 살린다 (이 때문에 뭔가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샤머니즘적 장식성이 부여되었다). 말 그대로 <엄마의 땅>에서 인물들은 인간이면서도 퍼펫의 물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풍경과 퍼펫, 이 둘을 종합하자면 퍼펫에 한정되어 있던 움직임이 풍경에게도 부여되었다. 그래서 풍경 자체가 거대한 스케일의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퍼펫은 그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퍼펫 자체의 고유한 성격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퍼펫 사이에 놓인다. 그리하면 박재범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풍경과 퍼펫, 자연과 존재 사이에서 때론 갈등과 긴장을, 때론 화해와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을 담아내게 된다. 더 이상 세트와 퍼펫, 배경과 캐릭터라는 이분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은 한층 흥미로워진다. Covid-19 팬데믹으로 세상이 멈추었을 때, 박재범의 애니메이션도 다시 방구석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툰드라 다큐멘터리 팀과 함께 여정을 떠날 계획이었지만 봉쇄되었다. 당시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더미>의 폐소(閉所) 속에 놓였다. 그리고 ‘더미’의 탈출 대신, 홈트로 몸을 움직이면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법을 익혀 나갔다).
인물 중심의 스토리라인에서 벗어나, 풍경과 퍼펫의 재설정 (재발견, 재해석) 과정으로 박재범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바라보면 그의 커리어와 필모그래피가 단순한 ‘성장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탐색과 구도의 여정으로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따박따박’ 정돈된 정석의 길처럼 보였던 그의 경로가 실은 컴퓨터 그래픽의 특수 효과를 거부하며 기꺼이 어려운 과제들을 하나하나 부딪혀 해결하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오프로드였던 셈이다. 덕분에 우리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서 작은 것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서 살펴보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서 그 무엇도 당연하게 주어진 것은 없는 법이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