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Michelle
괜찮아? 미쉘, Michelle 2012 | 10mins 10secs | dir. 이문주 LEE Moonjoo
사고의 목격자, 그리고 상실을 관통하는 시선
하나의 드라마로 구성된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 한 가지는 ‘질서 (균형)’→ ’ 질서의 파괴’ → ’(새로운) 질서의 회복’이다. <괜찮아? 미쉘,>도 이러한 설명을 적용할 수 있다. 젊은이들의 파티 → 예기치 못한 사고 → 파티와 사고가 종결된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젊은이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은 정형화된 ‘이야기 유형’에 복종하기보다는, 저마다의 균열과 파열음을 만든다. <괜찮아? 미쉘,>도 마찬가지이다. 질서의 파괴와 회복이라는 공식을 증명하고 공고히 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질서는 무엇인가? 파괴된 것은 무엇인가? 회복은 가능한가? 등등…
여름날의 축제, 젊은이들은 마냥 들떴다. 주인공이든 구경꾼이든 축제는 모두를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한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축제의 본질이다. <괜찮아? 미쉘,>은 이러한 해방감을 시선으로 표현한다. 오프닝에서 보여준, 축제 장소로 향하는 연출은 과감하다. 이문주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카메라-시선 움직임이다.
축제에는 자신의 일행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도 많다. 경계심을 풀고 낯선 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축제의 매력이다. 모든 것은 그렇게 순조롭게, 흥겹게, 평화롭게, 달콤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조금 왁자지껄하는 것도, 평소보다 맥주를 더 마시는 것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도 축제가 허락한 자유이며, 너그러이 허용한 일탈이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흥에 취하여 물속에 뛰어드는 것도, 뛰어드는 자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경꾼이나 소란을 떨며 웃어대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사고였을까? 아니었을 테다. 모두가 평온했다. 물에 뛰어든 자도 평온했다. 자기 일행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스스로 헤엄쳐 나갔다. 그래서 그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로부터 잊힌 듯했다. 축제는 물에 뛰어든 상황 말고도 항상 여기저기서 소란과 소동이 벌어지니까. 평온이 깨지면 사고가 된다. 왜 물속에 있던 여자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나오지 못한 것일까?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뛰어든 것일까? 아니면 돌연 죽을 생각이 들었던 걸까? 죽을 생각이 없었는데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의지에 반하여 심장이 뛰지 않았던 걸까? 팔다리가 마비된 걸까? 알 수 없다.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물 밖의 사람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거나 발을 구르며 안타깝게 바라본다. 축제는 멈췄다. 파티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물을 경계로 삶과 죽음이 나뉜다. 그 경계에서, 살아있는 자가 죽어가는 자를 구하려 하지만 부질없다. 파괴되어 가는 질서를 멈추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미쉘!” 흐트러진 질서 너머로 잠기고,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그 여자의 이름인가 보다. “미쉘!” 뒤늦게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남자가 간절하게 그 이름을 부른다. 그가 연인인지, 가족인지는 알 수 없다. 미쉘이라는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몰랐듯이, 미쉘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그 남자만이 미쉘을 알 테고, 미쉘만이 그 남자를 알 것이다.
“미쉘!” 남자의 긴박한 외침. “미쉘!” 마음만큼이나 다급한 자전거의 질주. “미쉘!” 살아있길 바라는 간절함이 바쁜 시선의 움직임으로 그려진다. 불과 5분 전, 축제와 파티를 향하던 들뜬 시선을 좇던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고의 현장으로 내달리는 시선으로 대체되었다. 앞선 시선-카메라는 해방감, 즉 삶으로 충만했다면, 지금의 시선-카메라는 죽음에 잠식당하고 있다. 이문주는 그간 자신의 작품들에서 절제했던 시선-카메라의 역동성을 이 작품에서 상반된 방향으로 질주하도록 배치한다. 삶을 향해, 그리고 죽음을 향해. 축제에까지 이르렀던 질서는 산산조각 났다. 축제라는 건 질서를 잠시나마 흔들면서 (또는 흔드는 체 시늉하면서) 살짝 허용된 일탈과 무질서를 맛보았다가 다시 기존의 질서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의당 그랬어야 할 축제가 죽음을 만나면서 질서는 회복될 수 없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축제마저 강제 종결되어 버렸다.
축제 속 파티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돌아갈 때이다. 죽은 자를 구할 수도 없고, 죽은 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자를 위로할 수도 없다. <괜찮아? 미쉘,>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선-카메라의 동선을 재설정한다. 시선은 나로부터, 나와 함께 축제에 갔고, 파티를 즐겼고, 사고를 목격했고, “미쉘!”을 외치며 달려갔던 사내를 바라보았던 나의 동행들을 바라본다. 나의 시선이 향한 것은 단지 나의 동행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나와 함께 동일한 경험을 한 이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 내가 겪는 충격과 혼돈, 불안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두렵다, 나는 무섭다, 나는 혼란스럽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 일련의 사건들이 현실인가 꿈인가, 나는 슬픈가,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야 하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야 하는가 등등....
무엇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내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을 봐야 한다. 그들이 어떤 태도와 감정과 반응을 공유한다면 나도 그것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모습을 보니 나와 다를 바 없다. 그곳으로부터 돌아오는 모두는 나와 마찬가지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넋이 나간 듯, 표정과 감정과 언어를 잃었다.
그렇게 작품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흐트러진 질서, 복구되지 않은 폐허 상태로도 작품의 종결은 가능했다. 이것은 결코 사건의 원인을 밝히는 추리극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의도치 않게 바라보게 된 목격자들을 남겨두는 이야기만으로도 단편은 충분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의 답을 좇는 대신, 충격의 여파를 질문처럼 짊어지고 떠나는 목격자의 이야기 또한 나름의 여운을 남길 수 있다.
허나 <괜찮아? 미쉘,>의 마지막은 종결되지 않은 사건, 풀리지 않는 익사의 미스터리에 집착하는 대신, 무방비 상태로 허물어지는 목격자들을 다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로부터 시작한 시선이 나와 함께 했던 동료들을 하나씩 향하고, 마침내 또 한 번의 거친 시선-카메라의 움직임을 낳는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건 저마다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죽음, 상실, 두려움의 기억과 흔적들이다. 그러니까 그날 밤의 사고는 그 자체로도 충격이지만, 그 외부의 충격은 이제까지 조심스레 감추고 봉합하려 했던 각자의 은밀한 비밀과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래서 목격자이자 일행들이 아무런 감정과 표정과 말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그 순간 자신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상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묵의 형태로 서로에게 공명을 만들고 있었다.
<괜찮아? 미쉘,>은 이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하지만 드러난 사건 이외에도 또 다른 상실들이 앞과 뒤에 배치되어 있다. 첫 장면에서 들리는 통화 소리는 감독의 개인적 상실에서 가져왔고, 후반부에서 겹겹이 쌓인 상처를 담고 무작정 직진했던 친구는 당시 감독이 함께 했던 동료의 상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접근이 이문주가 만든 작품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문주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인위적으로 가공해 내지 않으면서도, 무작정 자신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되 주관적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대신 그것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하려 고민한다. 우리가 이문주의 작품들을 소박한 스케치와 고백으로 보다가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공감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다 보면 비로소 이 작품의 제목이 예사로운 문장 구성이 아니라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통상적이라면 “괜찮아, 미쉘?”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괜찮아? 미쉘,”이다. ‘괜찮아?’라는 의문형 문장과 ‘미쉘,’이라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문장이 합쳐져 있다. 미쉘은 일행 중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여자의 이름이다. 따라서 죽은 자 (그리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친분이 없는 자)에게 “괜찮아?”라고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미쉘’을 모르더라도,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대는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미쉘’은 목격자들의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쉼표 뒤에는 다음 단어들이 나와야 하고, 그 단어들이 모여서 비로소 완성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미쉘’은 특정인의 이름에서 벗어나서 목격자 각자의 상실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따라서 “미쉘,”로 시작하는 문장을 각자 이어받아서 자신들의 상실을 하나의 온전한 문장으로 완성시켜야 한다. 쉼표 대신 말줄임표를 쓸 수도 있겠지만, 자칫 침묵으로 묻어버릴 수도 있다. 쉼표는 침묵이 아닌 서술을 요구한다.
<괜찮아? 미쉘,>이라는 제목은 작품 속에서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목격자들에게만 향하는 과제가 아니다. 작품이든 문장이든 언제나 최종 마침표를 찍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우리 또한 저마다의 상실을 품고 산다. 나는 나의 ‘미쉘’로 어떤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