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How to Get Your Man Pregnant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A Long Alone | 2023 | 29mins 59secs | dir. 노경무 NOH Gyeongmu
29분 59초, 전력 질주 장애물 달리기 (정색 금지!)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애니메이션에게 적잖은 고민을 안겨준다. 일단 단편으로 불러야 할까, 중편으로 불러야 할까? (정해진 기준은 없다. 29분 59초까지를 단편, 그 이상을 중편이라고 나누기도 하지만 일종의 관례일 뿐 표준은 아니다) 영화제에서 상영된다고 해도, 특히 단편 작품들과 함께 상영 섹션이 묶이면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 3~4편에 할당될 분량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꼭 부정적으로 볼 건 아니다. 탄탄한 30분짜리 작품 세 편이 모이면 웬만한 장편 하나보다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월레스 앤 그로밋>의 출발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30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마치 육상 1만 미터 달리기와 같은 극한의 헐떡거림을 이겨내야 한다. 마라톤 보다도 어렵다는, 거리와 속도, 페이스와 스프린트와 지구력의 완벽한 조화. 30분은 장편은 아니지만, 21분 (흔히 접할 수 있는 시트콤 한 회분 분량)도 아니다. 장편의 구조처럼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관습과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단편의 호흡으로 한 번에 쑥 뽑아낼 수도 없다. 결국 관건은 드라마이다. 얼마나 짜임새 있게 탄탄히 이야기를 구축할 것인가.
노경무의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서 30분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이 요구하는 필요조건이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30분짜리 드라마를 만들 것인가? 선택한 소재는 ‘임신’이었다. 임신을 둘러싼 이야기… 아, 이런! 소재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그래, 누구나 ‘임신’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있지 않겠는가? 잠깐, 그런데 정작 임신을 소재로 다룬 이전의 애니메이션이 뭐가 있었더라... 물론, 출산을 둘러싼 작품들 (아주 섬세하고, 상당히 절실하며, 무척이나 고백적이었던 등등)은 있었지만, 정작 임신이 중심이었던 경우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왜, 어째서? 성역이었을까, 아니면 금기였을까? 그 사이에 임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였다. 그래서 더욱더 할 이야기가 많아진 것 같다. 사실, 할 이야기가 많아진 건 임신 자체가 아니라, 임신에 관한 이슈가 아닐까? 그래서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상영과 GV에 때론 모더레이터로, 때론 관객으로 참여할 때면 내심 긴장하곤 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불꽃이 튀고, 그 와중에 어떤 식으로 전선이 형성될지 모를 일이었다. 젠더가 중심이 될까, 세대가 중심이 될까, 아니면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될까? 그럴 때마다 흘끔흘끔 감독 노경무를 바라보게 된다. 너무나 차분하고 태연한 모습. 얼마큼의 예상 질문과 답안지를 준비해 놓은 걸까? 어떨 땐, ‘자, 어서 던져 보시지. 드루와~’하는 여유까지 엿보인다. 누군가 눈치껏 에둘러 조심스레 (게다가 공손히) 살짝 건드렸을 때 (결코 도발이 아니었다), 노경무가 답했다. “한번 실컷 놀려주고 싶었어요!” 맙소사! 내가 GV에서 경험한 가장 쿨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대답이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순간, 자멸이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코미디이다. 현실을 비트는 풍자와 야유가 있는 블랙 코미디이다. 바로 임신을 둘러싼 이슈 (그리고 이슈 몰이)에 대한 풍자와 야유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임신을 중심에 두고 있다. 임신 자체와 임신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동시에 다룰 수 있을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면 아주 정교히 전략을 짜야한다. 일단 “남성이 임신한다”라는 설정을 내세운다. 물론 참신한 아이디어는 아니다. 이미 차고 넘친다. 대부분 안일하게 접근해서 식상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서 ‘남성 임신’은 손쉬운 문제 해결책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생성하고 변형시키는 문제 증폭기/변조기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슈에 대한 대립 전선이 수시로 바뀐다 (덕분에 누군가 ‘옳다구나, 이 지점에서 싸우자’라고 전투 준비를 하더라도, 그다음 순간 다른 쪽에서 대립각이 만들어진다. 싸우려던 자는 뻘쭘해진다).
잘못 건드리면 초장부터 판을 그르칠 ‘취급주의’ 소재임에도 감독은 주저함 없이 첫 장면부터 주인공 강유진을 링 위에 올린다 (진짜 링이다). 임신의 압박을 한 방에 때려눕히고,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외치는 전사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강유진은 임신을 적극적으로 원한다. 10년간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임신에 대한 선택권을 둘러싼 성정치 담론이 아니라, 임신을 자발적, 적극적으로 원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불임/난임의 고통과 절망에서 출발한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결코 당사자들의 심정에 닿을 수 없는 ‘어른’의 세계이다. 가임 여성의 임신/출산 기피가 아니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상황을 내세움으로써 기선을 잡았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남성 임신’이 가능해졌으니, 남편 최정환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묻는다. 그러니까,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기에 ‘선택’이라는 장치를 넣음으로써 당사자의 판단과 책임을 명확히 한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아주 재빠른 스텝을 통해 임신을 둘러싼 두 가지 클리셰 (‘요즘 여성은 임신을 기피한다’와 ‘무작정 남성이 임신하면 저절로 성차별이 해소된다’라는 안일한 발상들)를 격파한다.
그래도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닌지라, 이 부부는 남편의 임신을 선택한다. 이제 본격적인 빌런들과 마주할 시간이다. 어째서 임신이 부부간의 영역에 머물지 못할까? 답은 명확하다. 대를 이어야 하니까… 가부장 전통이 이들 앞에 떡 하니 버틴다. 남편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지운다 (개인적으로 ‘굳이 어머니의 존재를 지워내야 했을까?’ 내심 의아해했지만, 감독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들의 출생을 위해 어머니가 희생되었다는 것만으로 가부장제를 고발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이라면 여전히 어설프고 안일한 접근이다. 작품은 타격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서, ‘남성 임신’ 결정에 가부장제를 결합시킨다. ‘어찌 남자가 임신을 해?’라는 반발을 예상했는가? 노, 노~ ‘대를 잇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최정환의 임신은 지지를 얻는다. ‘아들 보다도 더 중요한 건 아들의 계보’라는 인식이 바로 가부장제의 핵심임을 드러낸다. 꽤 끔찍한 이데올로기이지만, 작품에서는 블랙 유머를 낳는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난센스인가! (이 지점에서 비로소, 어머니를 지우는 설정이 과할 수 있었지만, 꽤 충실한 빌드업일 수도 있겠다고 감독의 결정을 인정하게 되었다). 부인의 희생을 요구한 가족이 ‘다음 세대 아들’을 위해 ‘현재 아들’의 생식력을 전환하는 결정을 아주 과감히, 호탕하게, 사실은 별 고민 없이 해내는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의 전선이 젠더가 아니라, 세대 혹은 가부장제로 옮겨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정한 본진 캐릭터가 등장한다. 가장 핵심 사건인 ‘남성 임신’의 키를 쥐고 있는 닥터 김삼신! 삼신 할매의 현신이면서 근미래 의학 기술의 지존인 김삼신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정말이지, 최근의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가 아닐지 싶다!). 출생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마치 현실 세계를 구해낼 구원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웬걸?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과 신념은 광기 속에 녹아드는 것 같다. 첨단 의료 기술이 무속 신앙적 상징물과 병치되고, 극락도와 같은 장면이 전개되면서 과학은 미신, 혹은 광신의 종교로 위험하게 넘나 든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전선은 다시 재편된다. 오랜 세월 SF 이야기에서 빠져서는 안 되었던 ‘미치광이 과학자’가 가부장 제도와는 별개의 전선을 긋는다. 뒤틀린 개인적 욕망과 과부하 걸린 사회/국가적 요구가 결탁하여 만들어낸, 대괴수 불가사리 같은 지식-권력 메커니즘의 폭주가 바로 김삼신이다 (김삼신이 어째서 그리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은 만화책 버전의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 또한 구매할 충분한 가치가 있으므로, 스포 방지 차원에서 더 이상의 언급은 참으련다).
자, 이제까지 표적이 몇 번이나 바뀌고, 그러면서 대치하는 전선이 얼마나 자주 새로 그어지고 지워지는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전황을 따르다 보면 마치 이 작품은 사방이 지뢰밭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수시로 뒤집히는 갈등 관계 속에서 광역 저격을 하며 닥치는 대로 “다 덤벼라” 내질러 보는 난장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저마다 사연과 처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적이 되는 대환장 파티로 무작정 내달리는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서 가장 재미난 장면이 펼쳐지면서 작품 전체의 밸런스를 절묘히 잡아주는 순간이 남아있다. 바로 멘토들과의 만남이다. 이미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남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이 지점은 작품 전체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기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만화책의 그림을 담당한 쏘키 작가는 애니메이션 버전에서는 캐릭터 디자인을 맡으면서, 전체적으로 ‘모던 카툰 스타일’을 구현했다 (이 스타일은 첫 출발점인 미국 U.P.A. 스튜디오의 초기 주요작부터, 이후 자그레브 그룹의 문제작들을 거쳐, 한국의 신동헌 감독이 만든 <장군의 수염>에 이르기까지, 사회 풍자에서 그 매력과 진가를 발휘했다). 그런데 멘토들의 장면은 실사를 토대로 그래픽적으로 옮긴 로토스코핑으로 다뤄진다. 단순히 새로운 기법을 적용했다거나, 작업의 편의성, 효율성만을 좇는 것에 그치는 시도가 아니다. (비록 허구이지만) 실제 경험담을 생생하게 전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이때 멘토들의 디자인 스타일이 여전히 모던 카툰 스타일로 다뤄졌다면 설득력을 잃었거나, 다소 빤한 개그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 지점은 정확히 ‘웃프게’ 연출을 계산해야 하는 승부처이다. 실제 배우의 연기를 통한 생생함, 다소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통한 웃음, 그리고 그들의 하소연이 자아내는 씁쓸한 육아의 고됨 등등이 모두 결집하는 곳이다. 그러면서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가 임신과 출산, 육아의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임신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이루었던 기존의 프레임들은 모두 붕괴되고 만다. 말 그대로 멘토들의 하소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 있는 걸까?’ (이런 점에서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로토스코핑 기법을 단지 수단이 아니라, 표현의 차원으로 접근한 보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이 모든 관계의 설정들을 관통하면서 마침내 지정된 도착지였던 29분 59초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나름대로 마련해 둔 해결, 결말이 있다. 엔딩에 만족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지가 이 작품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는 않다. 완전히 파국으로 끝나거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거나, 더 큰 문제가 그들의 앞날에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를 흘리며 끝나거나…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29분 59초짜리 애니메이션은 꽤 긴 호흡이 요구된다. 그 시간을 단지 결말을 향해 소모하는 부차적인 요소로 여긴다면 (그래서 건너뛰기나 빨리감기로 단축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애초에 이 분량의 작품은 적절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완고한 (혹은 불굴의) 가치/신념 체계를 탑재한 상태에서, 정해진 ‘올바른’ 문제 설정과 그에 따른 ‘올바른’ 결말을 요구한다면, 소중한 29분 59초의 시간을 굳이 이 작품을 보는데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당신의 의견이 옳습니다!). 만약 29분 59초의 러닝타임을 정속도로 주행했다면, 우리는 그 여정 속에서 여러 자리를 옮겨가면서 매 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창 밖의 풍경을 함께 본 것이다. 꽤나 근사한 여행을 함께 했다. 무엇보다 그 속에서 쿨내를 한껏 느꼈다면 나로서도 반가울 것 같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서 내가 찾아낸 가장 큰 발견은 ‘쿨~한 감독’ 노경무였으니까 말이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