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Echo
메아리 Echo | 2022 | 17mins 26secs | dir. 김상준 KIM Sang Joon
목소리를 전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일상, 그리고 작은 균열
누군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서 새벽마다 “야~호~”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의 나, 그러니까 어른인 나라면 일단 식전 댓바람부터 질러대는 소리에 몹시 짜증과 화가 날 테고, 그래서 아파트 경비실에 연락을 하고, 어떤 인간인지 흘끔 건너다보고, 그 X의 인상착의에 따라 어쩌면 불안감이 차오를 테고, 그래서 가족들에게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할 것이고, 그 X로 인한 불쾌한 감정을 식탁 위에 올릴 거고… 어랏, 어째 작품 속 아버지의 행동과 똑같아버렸다. 그래, 어른들은 그렇다 (<바퀴 돈다> (2018)와 <비둘기> (2020)를 통해 감독 김상준은 어른들을 잘 다루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이라면, 그리고 형제와 친구들이 있다면, 일단 우리는 그 인간을 “야호맨”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제부턴가 그는 “야호맨”으로 불릴 게다), 어김없이 이른 아침에 등장하는 그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경계심을 함께 느끼며, 거기에 반응하는 어른들의 모습 (누군가는 맞받아서 쌍욕을 날릴 것이고, 누군가는 경비실에 연락을 하고, 어쩌면 경비원 아저씨와 함께 “야호맨” 추격전을 벌일 수도 있겠다)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학교에서는 하루 종일 “야호맨”의 정체와 관련된 최신 소식 (당연히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추측들)을 주고받고, 그러다 하교 후에는 심심해하는 친구들과 “야호맨”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계획할 것이다 (물론 절대 혼자서는 못한다)… 어맛, 이 또한 작품 속 아이들의 행동과 판박이네? 역시나, 아이들도 매 한 가지다.
<메아리>는 그런 이야기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아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에 살짝 균열이 들어서는 이야기이다. 이른 새벽에, 머리가 덥수룩하고 팔다리는 긴, 그러니까 다소 독특한 행색의 남자가 (여자여도 마찬가지겠지만) 위협적인 거리는 아니지만 (아파트 단지 안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 거리도 아닌 (사실 철책만 넘으면 되는) 제법 신경 쓰이는 거리에서, 큰 소리로 목청껏 (일단 이게 문제다) “야~호~”라고 외치면 (욕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만), 그것도 매일 아침 (그래, 이게 제일 거슬린다) 벌어지는 상황. 대단한 사건은 아니기에 누군가는 무심히 넘기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작은 소란이 <메아리>의 출발점이다.
어른들은 그때 잠시 잠깐 반응하겠지만, 그러면서 하루를 피곤 속에서 바쁘게 살면서 잊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또다시 잠시 잠깐 반응하겠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야~호~” 소리는 자명종 알람이나 엄마의 잔소리 보다도 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기상나팔’이며, 덕분에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성장 모험담과 도시 괴담 사이에서 다양한 마침표 후보들
누구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가에 따라 이 작품은 달라질 것이다. 어른이 주인공이라면 “야호맨”의 정체를 밝히려는 과정이 중심에 들어오면서 (물론 그래서 조금 더 장르적인 재미가 더해질 수도 있겠지만), 정체와 사연이 드러나는 결말에는 아주 시시한 해프닝이거나 몹시 심오한 사회 고발로 귀결될 것이다. 음, 어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아이들이라면? 아이들은 겁이 없다가도 갑자기 많아지고, 반대로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가도 돌연 겁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계하다가도 덤벼들고, 달려들었다가 곤궁에 빠진다. 소년들의 무모한 모험 이야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주로 남성 위주였던) 작가들이 이미 어린 시절에 그런 모험을 저질렀거나 휩쓸렸거나, 아니면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그런 모험을 꿈꾸며 짜릿함을 맛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군대도 가기 전에 이미 경험한 ‘무용담’이 바로 “모험 소년” 썰이다.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그럴싸하게 부를 수도 있겠다.
<메아리>는 소년들의 모험을 다루면서 하나의 성장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매일 아침 등장하는 야호맨, 그를 반기지 않는 어른들, 두 진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안성맞춤이다. 상징적으로 둘 사이를 가르는 철책 울타리, 저 너머 야산 속에 감춰진 야호맨의 거처는 심연의 핵심과도 같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서구에서 쏟아져 나온 모험담 (우리는 이들 중 일부를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의 목록 속에서 탐닉하기도 했다)의 궤를 따르는 것이다. 이제 뜻을 함께하는 원정대를 꾸려서 여정을 나서면 얼추 전형적인 서사의 기본을 갖추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또 다른 장르의 맛을 추가한다. 바로 도시 괴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야호맨은 “산 구석에서 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 “키가 되게~ 되게~ 크고, 입도 진짜~ 진짜~ 크고, 사람을 한 번에 잡아먹을 정도로 몸이 커다란 괴물”이다. 하필 얼마 전부터 야구르트 아줌마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야구르트 아줌마란 어떤 존재인가? 그 시절 아파트 단지, 동네의 사정을 가장 빠꼼히 꿰고 있는 상징적 존재가 아니던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주민들의 장내 유산균 공급을 책임지던 그런 분이 돌연 보이지 않는 건 분명 큰 사건이다. 어른들은 바쁘게 사느라 그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아이들은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사태가 흘러가면 아이들은 으레 ‘소년 탐정단’이 된다. 추리는 늘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대개는 답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끼워 맞추기 식으로 추리하지만 말이다. 다들 “범인은 바로 야호맨!”이라고 멋지게 외치고 싶었을 게다.
첫 번째 마침표
그렇다면 남은 과업은 직접 야호맨을 찾아가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모험 이야기와 도시 괴담이 만나게 될 것이다. 감독은 이 접점의 경로에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끔 몇 가지 트랩들을 마련해 두었다. 뱀이 출몰하는 곳이라는 경고 현수막 (아무렴, 여정에는 괴물이 등장해야 하는 법!), 이에 대비한 나무 막대기 (나름 방어구 아이템), 태권 소년 상훈 (워리어 역할의 무도인이 빠지면 섭하지), 왠지 나무 뒤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점 샷 (그저 멀찍이서 아이들의 모습을 프레임 속에 넣고, 그 사이에 나무를 배치했을 뿐인데도 효과가 좋다), 적막 속에 들리는 바스락 소리… 그리고 정말 야호맨의 거처에는 버려진 야구르트 배달 가방과 카트가 있었으며, 갑자기 나타난 야호맨은 골프채를 휘두르며 내려치려 했다. 물론 이것들이 모두 범죄의 증거일리는 없다.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현장에서는 몰랐지만, 사실 야호맨도 아이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스포 아님 주의!).
모험의 여정이 짜여진 이상,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 목적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원래 원했던 것을 달성하던가 (도시 괴담이라면 “범인은 바로 야호맨!”이라고 외치며 범죄를 해결하는 것), 아니면 그 목적지에서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귀환하면서 원래의 목표와는 또 다른 결실 (모험 이야기라면 예컨대 ‘파랑새’처럼 이미 자신 곁에 있던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의 재발견이라거나, 생고생 과정을 통한 ‘성장’ 같은 것)을 얻기 마련이다. <메아리>에서는 무엇이었을까? 야호맨의 결백? 야구르트 아줌마의 무사 귀환? 그리 거창할 필요는 없다.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반복되는 새벽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야호맨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사라진 일상의 회복일 테고, 이는 훗날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 글을 맺을 수도 있었겠다. <메아리>가 8분 50초에서 마무리지었다면 말이다. 야호맨이 골프채를 휘두르려 했던 이유가 뱀을 잡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야호맨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9분 25초에서 끝내는 것도 가능했다. 야호맨을 향해 콩주머니를 던지는 꿈을 꾼 후, 야호맨이 찾아오지 않는 아침을 맞이하는 상태로 결말. 그랬다면 그동안 의심을 하고 두려운 인물로 오해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실제로 돌을 던져서 야호맨을 다치게 했던 어제의 일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여운을 주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이야기는 두 형제와 친구 상훈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아트웍은 이들을 부드럽고 따뜻한 그림책 스타일로 담아냈기 때문에 유년기 추억을 담은 제법 사랑스러운 드라마가 된다. 그리 했다면 모험담은 메인 서사가 되고, 도시 괴담은 이를 받치는 서브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두 번째 마침표
하지만 <메아리>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다. 전체 러닝 타임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이제야 작품의 절반에 다다른 셈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야호맨에 대한 감정이 바뀐다. 호기심의 근원에 깔려 있던 두려움을 대신하여 걱정이 자리한다. 여전히 야구르트 아줌마는 안 보이는데 (일을 그만 두신 걸까?), 돌연 야호맨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금 더 규모가 커진 (동료 무도인들이 합세하였다) 2차 원정대가 출격한다. 그러나 그 사이 야호맨의 남루했던 폐가는 완전히 철거되었다. 폐허의 잔해 위에서 신참 원정대원들은 야호맨의 위험성을 이전보다 한껏 부풀려 이야기하지만, 기존 원정대원들 특히 야호맨이 뱀으로부터 구해준 상준은 야호맨을 변호한다. 야호맨은 더 이상 식인종으로 불리어서는 안 된다.
“나쁜 아저씨는 아니야!”라는 상준의 선언과 함께 이 지점, 그러니까 신참 원정대가 더 이상 야호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신나게 폐허를 빠져나가는 지점도 마침표를 찍기에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 있었다. 기타 연주가 들려오는 11분 10초 지점에서 엔딩 크레디트를 띄우면서 마무리하는 선택. 그렇다면 야호맨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적절히 무게 이동을 하면서 꽤 근사한 작품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준의 어깨를 툭 치며 “힘내!”라는 무언의 격려를 한 후, 산길을 박차고 내달리는 아이들의 뒷모습, 그리고 숲 속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 쑥대밭이 된 야호맨의 흔적을 뒤로하며, 이와 대비되도록 미래를 향해 열린 가능성을 펼치는 멋진 구성 아닌가? 아니면 가을 낙엽으로 바뀌며 시간의 경과를 보여준 후, 저녁놀이 질 무렵 아파트 벽 틈새에 박힌 테니스공들을 담아낸 11분 30초까지 천천히 이끌어가는 것도 여운을 위해서는 훌륭한 호흡 조절이 될 수 있다. 야호맨은 현실 속에서 사라졌지만, 오히려 상준의 마음속에는 깊숙이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으리라.
더욱이 이 지점에서 상준 형제는 왠지 한껏 성숙해진 느낌마저 보여준다. 또래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야호맨의 진실을 두 형제만은 공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실은 때론 소수만이 가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경험하는 지점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땅에 떨어져 있는 야호맨의 골프채를 바라보는 장면 다음으로, 전날 밤 철거 포클레인 앞에서 무력하게 그 골프채를 떨어뜨리는 야호맨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러한 상황을 상준 일행이 목격했을 리는 없다. 이 장면은 오히려 쑥대밭이 된 거처와 미처 챙기지 못한 골프채를 통해 상준이 상상했을 야호맨의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철거와 개발을 둘러싸고 어른들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할 나이의 아이들이지만, 야호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건 분명 성숙한 마음이다.
세 번째 마침표
그런데 <메아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 아직 회수할 떡밥이 남아 있다. 다행히 야구르트 아줌마는 무사하다. 진하게 그을린 얼굴, 선명하게 남은 선글라스 자국, 정말 긴 휴가를 다녀온 모양이다. 그리고 철거의 목적. 야호맨 거처가 있던 뒷산으로 거대한 스포츠 센터 건물이 빠른 속도로 한창 공사 중이다. 그렇다면 야호맨은? 노을의 붉은빛을 등지고 삽질을 하는 긴 팔다리 사내가 야호맨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야호” 상준의 외침, “야호” 상준 형제의 외침. 야호의 방향이 바뀌었다. 산에서 아파트를 향했던 야호맨의 외침이 이제는 아파트에서 원래 산이 있던 곳으로, 야호맨을 향해 아이들이 소리친다. 그 사이에서 제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두 손을 내저으며 하지 말라는 어른-아빠와 경비원 아저씨. 들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아이들의 호응이 늘어난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야호맨. 공사 중인 건물에서 마주하는 아파트는 더 이상 올려다보는 각도가 아니다. 야호맨이 시원하게 내뱉는 “야호”. 거의 14분에 다다르는 지점. 야호맨은 살아 있고, 상준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야호맨을 잊지 않았고, 그렇게 서로를 향해 외치는 “야호” 소리의 교감. 모험은 완성되었고, 괴담은 사라졌고, 서로는 소통하였다. 더 바랄 것 없을, 최적의 엔딩 포인트 같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아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메아리>를 보다 보면, 특히 상영관의 큰 스크린으로 보다 보면 왠지 이 작품의 장면들이 어딘가 묘하게 기존의 익숙함에서 살짝씩 벗어나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굳이 문장으로 풀자면, “분명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는,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풍경인데 어쩐지 기존의 애니메이션 (그리고 영화, 드라마 등)에서는 잘 시도되지 않은 카메라 앵글로 바라본 시선”이랄까? 어째서일까?
일단 화면의 종횡비(가로X세로 비율, aspect ratio)가 흔한 와이드 규격인 16:9*나 1.85:1** 대신, 21:9 (약 2.39:1) 즉 예전 시네마스코프에 해당하는 비율을 따른다. 좌우 수평폭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길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낙타를 타고 저 멀리서 나타나는 광활한 사막이 아니라, 고층 아파트를 무대로 삼는다. 즉 주요 피사체는 세로로 길고, 화면은 가로로 넓다. 미스매치인가? 그럴 리가! 해결책은 대각선을 활용하는 것. 직사각형 내부에서 가장 길게 뽑을 수 있는 직선이 바로 대각선이다. 물론 <메아리>에서 아파트가 대놓고 대각선 구도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일단 사선으로 비스듬히 기울인다. 그다음, z축을 상정하여 일종의 소실점을 마련한다. 쉽게 말해 지상에서 올려다보면 저층부는 넓어 보이고 고층부는 좁아 보인다. 여기서 (가상의 z축을 따라) 저층부를 조금 더 화면 앞으로 끌어내고, 고층부를 화면 뒤쪽으로 밀어내면, 시네마스코프 비율 속에서 아파트의 높이와 규모가 제법 웅장해지고 입체감과 깊이감이 산다.
* 1.78:1로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TV, 모니터 비율.
** 비스타 비전 기반의 대표적인 극장 화면비율 중 하나로, DCP Flat 표준이기도 하다.
그다음으로 차별화된 시선은 아파트 내부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조금만 현실적으로 군다면 대번에 상준이가 사는 아파트의 실평수를 짐작할 수 있다. 4인 가족, 형제가 한 방, 그리고 부모가 한 방, 거실과 주방이 연결된 구조. 방이 하나 더 있을까? 그러기엔 거실이 그리 넓지 않다 (있다면 아주 작은 크기로 딸린 정도). 방 3개 (혹은 그 이상) 짜리 아파트와 방 2개짜리 아파트의 차이는 거실의 크기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거실 크기는 이와 붙어 있는 주방의 크기와 연동한다. 도대체 이런 정보가 왜 중요하냐고? 왜냐면 이를 통해 인물들 사이의 거리가 조정되고, 한 화면 속에 담기는 가족/가정의 모습에 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해 인물 간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구체성, 사실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아리>에서 담아내는 집 안의 모습은 우리가 그 정도 크기의 아파트에서 경험하는 공간감, 즉 4인용 식탁에서 곁에 앉은 사람, 마주 앉은 사람과의 간격, 거실 소파에서 TV까지의 거리, 형제가 함께 쓰는 방에서 찾을 수 있는 한정된 여유 공간, 침대 옆에서 창문까지의 높이, 식탁에서 바라보는 베란다까지의 거리 등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간혹 우리가 어떤 작품의 실내 장면에서 뭔가 부자연스럽다든가, 붕 뜬다든가, 휑해 보인다든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대개는 공간 실측은 정확하게 했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메아리>는 집 안의 모습을 담는 시선의 기본값을 실제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눈높이와 위치에 둔다. 거칠게 말하자면 카메라를 벽에 붙여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 위치 (벽에서 대략 50cm~1m 정도 떨어진 간격)에서 카메라를 들고 바라보는 시야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로부터 필요에 따라 앵글을 비스듬히 살짝 기울이거나, 집 밖에서 집 안을 (그리고 집 안에서 집 밖을) 틸트 업/틸트 다운으로 바라보면서 장면들 사이에 변주를 가한다. 이렇게 살짝 틀어진 시선의 각도는 사실 우리가 평소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맞은편을 건너보거나 거실 창 밖을 내다볼 때 흔히 경험하는 시야각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러하기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시선이 <메아리> 곳곳에 심어져 있다.
그다음 포인트는 바로 아파트의 건축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특히 작품이 (그리고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기반하고 있는 1980년대의 복도식 아파트 구조. 이러한 복도식 구조는 아파트 건설 붐 이전까지 동네 공동체를 수평적으로 연결했던 골목***을 일정 규격으로 쪼개어 수직적 층위로 재배치하는 커다란 변화였다. 복도를 공유하는 같은 층의 주민들은 하나의 묶음으로 이어지면서도 다른 층의 주민들과는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나 간헐적으로 연결된다. 복도 쪽으로 창이 있는 방은 보안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급적 커튼이 드리워진다 (가뜩이나 남향으로 난 거실의 반대편, 즉 북향이라서 볕이 잘 들지 않는데, 커튼까지 쳐져서 늘 어두컴컴하다). 골목에서는 고개를 들면 어디서든 하늘이 보이지만, 아파트 복도에서 하늘을 보려면 복도 밖으로 목을 쑥 빼고 맞은편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건너 봐야 한다. 그나마도 제한적으로만 보인다. 그래서 상준 형제는 곧잘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본다.
*** 1990년대까지 TV 드라마에서 골목을 통해 연결된 동네 공동체를 다룬 작품은 많았어도, 실제 골목 자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당시 드라마가 현장 로케이션이 아닌, 스튜디오 세트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2015년에 방송된 <응답하라 1988>를 통해 비로소 골목 풍경과 공동체의 일상이 현실적으로 담겼다. 물론 시청자에게 그 풍경은 동시대적이라기보다는 이미 노스탤지어 속으로 옮겨진 기억에 가깝다. 이 드라마의 OST에 쓰인 여러 노래 중에서 <혜화동> 또한 ‘골목’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면 골목을 떠나 온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어떻게 놀까? 별 수 있나?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면서, 층층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복도를 내달리는 수밖에. 요즘 잣대로 보면 민폐이지만 (그때도 민폐이기는 했다), 그저 골목에서 왁자지껄 한바탕 휩쓸고 지나는 것처럼 아파트 동 하나를 시끌벅적 휘젓는 식이다.**** 그래서 <메아리>에는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때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려진다. 친구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 골목 안 친구네 집 대문 앞에서 “놀자~”고 소리치던 것처럼,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서 소리치며 대화한다. 그럼에도 완전히 새로운 놀이가 생겨났다면 바로 높이 높이 공을 던져서 아파트 옆면의 틈새에 공을 끼워 넣는 놀이일 테다. 이 틈새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미적 장식인지 아니면 건축 구조적 설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테니스 공을 높이 던져서 자신의 기록을 남기는 독특한 신체 활동을 낳았다.
**** 봉준호의 장편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 (2000)에도 복도식 아파트의 구조를 맛깔나게 살린 명장면들이 나온다.
<메아리>는 바로 이 지점을 포착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풍경, 어쩌면 1980~90년대에만 가능했던 (그 이후로는 아파트 벽면에 그런 틈새가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테니스 공을 던지고 놀만큼 아이들에게 놀이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고, 그런 시도를 허용할 만큼 관대해지지도 않았다) 독특한 풍경을 작품의 중요한 호흡 지점에다가 배치하였다. 그것도 그저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주 과감하게 90도로 각도를 틀어서 수평축 위에 놓아 부각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작품 전체에서 가장 낯선 시선을 선사한다. 아파트 벽면에 박혀 있는 테니스 공을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바라보는 이 시점은 과연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메아리라는 마법
이처럼 <메아리>가 독특한 앵글의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찾다 보면 결국 비율과 공간, 그리고 구조를 들여다보게 된다. 예사롭지 않은 설정의 중심에는 아파트가 놓인다.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를 때가 되었다. 세 번째 마침표를 찍은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거대한 아파트를 마주한 야호맨은 이전처럼 지상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야호를 외치지 않는다. 아파트와 대등한 높이의 신축 건물 공사장에서 아파트를 마주하고 외친다. 이때 아파트는 높이가 아닌 너비로 자신을 드러낸다. 복도식 아파트는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폭을 가득 채운다.
“야~ 호~!” 외침은 바람이 된다. 바람은 숨결이 된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것들을 깨운다. 테니스 공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 순간 시간은 다른 결의 흐름을 낳는다. 부엌 창 너머로 이 상황을 내다보는 엄마의 표정이 압권이다. 무표정? 아니면 무언가에 홀린 표정? 시간이 멈추어 버린 정지 상태?***** 정확히 의미를 읽어낼 수 없지만 왠지 이해할 것만 같다. 쏟아져 내리는 테니스 공들을 보며 화면 맞은 편의 우리도 그 마법에 홀린 듯, 정확한 감정의 표정을 찾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마법이 맞는 듯싶다. 붉은 노을, 그 중심에서 저물어 가는 노란 해, 느리게 쏟아져 내리는 공…
***** 엄마는 냄비가 끓어 넘치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이는 정유미의 <먼지 아이> (2009)에서 이제껏 감정을 지운 채, 기계적인/기능적인 동작으로 집안일의 루틴을 진행하던 주인공이 찌개가 끓어 넘치자 황급히 일어나다가 식탁 위 전등갓에 부딪히는 상황과 닮아 있다. 이를 통해 비로소 감정이라는 것이 깨어나고, 먼지 아이를 인정하는 태도로 전환한다.
이 마법의 순간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 엄마의 표정은 앞선 장면들에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제지하는 아빠의 모습과 대비된다. 허공으로 팔을 내젓는 아빠의 모습이 재밌어서 웃는 형제 (그 장면에서 카메라 시선은 거실 바닥에서 아주 천천히 형제들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전율의 100초! 형제가 함께 “야호”를 외치는 13분 10초부터 엔딩 크레디트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14분 50초까지, 이 마지막 100초를 위해 감독은 최종 마침표를 아껴두었다. 메아리를 꼭꼭 눌러 담아두었다가 마침내 펼쳐내는 지점이다. 메아리로 응답한 것은 누구일까? 새벽마다 소리쳤던 야호맨에게 비로소 아이들이 답을 한 걸까? 그렇다. 그리고 오랜만에 등장한 야호맨에게 야호라고 인사를 건넨 아이들에게 “나 살아있다”라고 야호맨이 답을 한 걸까? 그렇다. 테니스 공도 메아리에 대한 화답일까? 그렇다. 모든 것이 100초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아리는 아파트 자체의 울림이다…
“야호: 등산객들이 주로 산 정상에서 외치는 소리.
고립 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조난신호로 쓰이기도 한다.”
… 감독이 작품 맨 앞에 적어 놓은 ‘야호’의 사전적 정의를 이제야 다시 읽어 보게 된다. 그저 뻔한 내용이라 흘려 보았는데, 두 번째 정의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야호맨은 새벽마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 왔다. 고립으로부터의 구조 요청. 아이들이 야호를 외친다. 또 다른 의미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살려달라”는 조난신호라기보다는 “여기에 살아 있다/여기서 살고 있다”라는 생존확인의 메시지이자 인사법.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 자체도 깨어나 살아 있음을 알린다.
“소리가 산이나 절벽, 건물 등에 반사되어 되돌아 울려 퍼지는 현상”이 메아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원래 소리와 반사되는 소리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차이가 있어야 들을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아파트 건물이 그러한 반사체 역할을 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틈새에 박혀 있던 테니스 공이 떨어지는 원인도 소리의 진동과 파장이 증폭하면서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마지막 100초를 통해 깨어나는 것은 아파트였다. 아이들의 야호와 야호맨의 야호에 아파트도 화답한다. 테니스 공은 그저 물리적 이유로 낙하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는 그 공들을 틈 속에 품어오면서 묵묵히 시간대를 지켜봤다. 울려 퍼지는 메아리 속에서 비로소 아파트도 움츠렸던 품을 펼치면서 테니스 공을, 그 공에 담긴 기억들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아파트는 그저 공간적 배경에 머무는 대신, 스스로 작품의 주요 인물로, 어쩌면 진정한 주인공으로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마법의 100초는 오롯이 아파트를 위해서 마련된 시간이다. 왠지 독특하다고 여겼던 시선들 (가로로 눕혀져 테니스 공들을 바라봤던 시선, 아파트 복도와 계단 틈에서 비스듬히 아이들을 내려봤던 시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구석구석의 모습들, 뿐만 아니라 거실 아래에서 아이들을 올려다보며 조금씩 다가갔던 시선 등등)의 기원도 결국은 아파트라는 주인공의 시선일 때에야 납득이 가능하다.
그렇게 엔딩…
“목소리를 전해,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내 메아리가 울려 퍼지면, 네가 들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기억하기로 해”
모든 장면이 사라진 후 엔딩 크레디트를 따라 흐르는 노래는 작품 전체를 되짚으면서 이 이야기가 ‘나’와 ‘너’ 사이의 기억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노래가 작품 도중에 감정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삽입되었다면, 분명 나름대로 감동을 고양하는 효과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건 이후에, 천천히 흘러가는 크레디트와 함께 나왔기 때문에 진정한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이 곡 자체가 마치 작품 전체를 향한 메아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가사에서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너’는 누구일까? 야호맨, 아이들, 아파트, 이들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메아리의 상대이자, 기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마치 야호맨이 기타를 치며 부르는 듯한, 야호 대신 조용히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상상마저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에코로 울리는 코러스는 아파트가 따라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시되는 사진 한 장. 그 시절 아파트 거실에서 찍은 감독 김상준 형제의 사진이다. 작품 속 상준 형제는 자연스럽게 현실 속 상준 형제와 포개어진다. 이러한 설정은 또 다른 감독의 엔딩 연출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당시의 자기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돌아와 맺는 구조는 바로 김강민이 종종 보여주었다. 그동안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의 기억을 추억해 냈던 김강민의 작업은 이제 미국의 동부, 뉴욕에서 김상준을 통해 또 하나의 메아리가 되었다. 그들이 외치는 ‘야~호~’ 소리는 언제나 이곳의 우리에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전하는 목소리가 된다.
목소리의 메아리가 조금 더 멀리 울려 퍼진다는 것, 그 목소리를 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나타났다는 것, 함께 기억할 이야기가 늘어난다는 것… <메아리>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김상준이라는 멋진 창작자가 등장한 사실 또한 짜릿하다. 그가 “여기에도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있소~”라고 외치니, 나도 그만큼의 메아리로 답하고 싶다.
“야~ 호~”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