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ion Note_Society of Clothes
옷장 속 사람들 Society of Clothes | 2024 | 15mins | dir. 정다희 JEONG Dahee
오늘의 차림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시기 정다희 감독은 한국과 캐나다, 프랑스 공동 제작의 <옷장 속 사람들>을 만들던 중이었다. 이전처럼 혼자 작업하는 대신 프리프로덕션부터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하고 제작은 프랑스와 온라인으로 분담하고 후반 작업은 캐나다에서 했다. 애니메이션 감독의 모자는 베레모일까. 인터뷰 이후 3년여 만에 모자를 내려놓은 정다희를 만났다. 패션은 직업과 성격, 재력과 감각을 드러낸다. 반대로 진짜 내면을 감추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옷장 속 사람들>은 흔적을 통해 주인을 생각하게 했던 <빈방>의 거울 상이다. 함께한 작업도 혼자 한 작업에 비추어 또 다른 도전을 꿈꾼다.
“속도는 많이 달라졌어요”
제가 과천에 갔었을 때가 2021년 12월 3일이니까 어느덧 3년이네요. 그때 주로 얘기했던 게 <움직임의 사전>이었고 <옷장 속 사람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였어요. 긴 작업인 것 같기도 하고 금세 지나간 것 같기도 합니다. (2021년 12월 인터뷰)
가장 오래 걸리긴 했어요.
‘혼자 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다음에 뭐가 나올지 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작업을 해보고 싶다’
제가 그랬어요? 맞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 있어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세요?
예전에는 후반 작업에서 주로 협업을 했다면, 이번에는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협업을 했어요. 제가 작품에 참여한 비율이 줄어들고 다른 분들이 그 자리를 채워 주셨어요. 캐릭터 디자인은 VCR의 전은진 작가님이 도와주시고 배경 디자인은 이지혜 작가님이 같이 작업해 주셨어요. 방향을 제시해 드리긴 했지만, 제가 평소 그리지 않는 형태라든가 아트웍에서 새로운 것들을 제안해 주신 게 많아요. 그리고 이번 작업에서 애니메이팅을 하지 않았어요. 키프레임 동작만 그려서 레이아웃 잡아 드리면 김경하 작가님이 원화 작업 해주시고 그걸 프랑스로 보내서 동화 넣고 채색하고 이런 식으로 진행했어요.
호원: 3년 전 인터뷰에서 제가 감명 깊었던 게 스스로 하루에 2초 작업하는 감독이다라고
맞아요.
같이 작업을 함으로써 속도가 달라졌나요?
속도는 많이 달라졌어요. 여태까지 애니메이션을 거의 혼자 하다 보니까 제 나름대로의 제작 방식이 있긴 했지만, 팀이 어떻게 작업하는지는 잘 몰랐어요. 프로덕션 단계에서 팀 작업 경험이 많으신 김경하 작가님에게 배워가면서 했어요.
“기회가 오면 그거를 실현했던 것 같아요”
호원: 미유랑 비트윈더픽쳐스랑 NFB가 공동 제작으로 들어간 거죠.
NFB에 줄리 로이라는 프로듀서가 있었는데, 2014년에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왔을 때 같이 심사위원을 했어요. 그 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같은 해외영화제에서 종종 만났고,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을 해 주셨어요. NFB랑 협업하는 게 애니메이션 하면서 항상 갖고 있던 꿈이어서 정말 기뻤어요.
2017년에 캐나다의 시네마테크 레지던시에 갔을 때 줄리 로이한테 <움직임의 사전> 기획단계를 보여줬어요. NFB에는 프랑스어 파트와 영어 파트가 있는데, 프랑스어 파트는 공동 제작할 때 후반 작업에만 참여할 수 있어요. 그런데 <움직임의 사전> 한국 제작비가 작은 편이어서, 캐나다 입장에서는 후반 작업의 파이가 커지는 게 부담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 후 미유를 만나서 <옷장 속 사람들>을 한국, 프랑스, 캐나다 3국이 공동 제작하는 형태로 하게 되었어요.
제작비 비율이 어느 정도 맞아야지 공동 제작을 할 수 있었던 건가요?
아무래도 그게 합리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프로젝트가 이미 많이 진행되어 있어서 그쪽에서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미유랑 NFB랑 같이 제작하기로 결정한 후 각국에서 제작의 어느 단계를 맡을 건지 먼저 협의했어요. 한국에서 기획단계와 제작단계 중 원화, 배경을 작업하고, 미유에서 제작단계 중 동화, 채색, 합성을 하고, 마지막으로 NFB에 가서 후반작업을 하기로 했어요. 제작하면서, 미유에서 배경과 편집도 조금씩 도와주었어요.
원래 계획은 제작단계에서 시클릭 Ciclic이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레지던시에 가서 6개월 이상 체류하면서 거기 스태프들과 기술력을 동원해서 만드는 거였는데, 코로나가 터졌어요. 그래서 프랑스를 안 가게 됐고, 동시에 제가 학교에 취직을 하면서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어요.
프로듀서 간에는 회의를 자주 진행했어요. NFB 쪽에서 제가 좋아하는 미셸 르미유 감독님이 초반에 스토리 관련해서 멘토링을 해 주기도 했어요.
제일 먼저는 NFB와의 얘기가 있었고 그다음에 미유가 붙었고 영화진흥위원회는 이 둘이 결정되고 난 다음에 지원하신 건가요?
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에 기획서를 제출할 때, 계약서를 같이 제출했어요.
영진위가 중편 지원이잖아요. 보통 20분 정도 요청을 하는데, <옷장 속 사람들>은 원래부터 15분 길이였나요?
영진위에 최종 제출할 때는 20분 정도 길이였어요. 제가 편집을 항상 혼자 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미유에서 편집자가 붙었어요. 그분이 많이 쳐내면서 리듬감을 만들어 주셨어요. 군중 장면이 꽤 긴 편이었는데 굉장히 짧게 쳐내 주신 부분도 있고,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옷장 속 사람들>은 전시용 버전은 어떻게 되었나요?
전시용 버전을 동시에 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못했어요. 그게 언제 실현이 될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극장용 버전과 같이 기획을 했는데, NFB는 전시에는 투자할 수가 없고, 미유는 관심이 있었지만 우선 영화를 완성하는 게 중요했어요. 시간이 촉박했고 일이 너무 많았어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하는 것 때문에도 그랬고, 제가 해야 하는 작업에 더해 모든 작업자들의 작업을 검토하고 피드백하는 게 정말 많은 일이더라구요.
호원: 저는 2024년이 초현실주의 100주년이어서 퐁피두에서도 전시하고 해서 미리 기획을 해서 거기에도 들어가는 작품이겠거니 생각을 했어요.
애니메이션을 전시로 만든 경험이 두 번 있는데요. <빈방>도 처음부터 전시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실제로 전시를 하게 된 건 한참 나중이었어요.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그거를 실현했던 것 같아요. 미리 치밀하게 준비를 하는 편은 아니에요.
“사람이 없어도 사람을 대신해서 표현할 수 있다”
기획 의도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인디애니페스트 트레일러 <Who aRe you>(2020)를 만들면서 사람이 만든 물건, 입는 옷이나 모자 같은 것들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사람이 없어도 옷이 사람을 대신해서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유 프로듀서 엠마뉴엘이 이 트레일러를 굉장히 좋아했고 이 소재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먼저 해줬어요.
작업을 할 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연관된 소재에 관심을 갖게 돼요. 그 소재가 갖고 있는 상징, 신화, 이야기 같은 것들을 공부하면서 아이디어를 짜고 그림을 그려요. <옷장 속 사람들>도 처음에 의복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쓰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때 나왔던 아이디어들이 캐릭터로도 등장하는데요. 아이 옷이 어른 옷을 입고 어른인 척을 한다거나, 화려한 옷 위에 더 화려해 보이는 옷을 겹쳐 입는다거나, 여성 옷이 남성 옷을 입는다거나…
동시에 그 당시 제가 학교에 취직을 하면서 갑자기 저한테 다른 사회적 옷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그 옷으로 본다고 느꼈어요. 옷과 실제의 나 사이에 의문을 품게 되었어요.
옷은 그것을 입은 것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장갑이나 모자, 특히 신발이 굉장히 반항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나오잖아요.
네, 옷으로 자기 정체성을 먼저 만들고, 장갑, 모자, 신발은 따로 자기 의지를 가진 존재들로 나오죠.
옷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침에 집을 나서서 유령처럼 우르르 어딘가로 몰려가 일을 시작하는데, 그들은 거기서 무얼 할까 라는 상상을 해봤어요. 그들은 장갑을 끼려고 하고 모자를 쓰려하고 신발을 신으려고 하더라고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더 소유하기 위해 일을 하잖아요. 그게 나한테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느 사회에 속하면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그 사회가 정해주는 것 같아요. 옷들도 그것들을 가지려고 하면서 자기를 강화시키거나 다르게 변화시키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죠.
호원: 사회학과 출신으로서 한글 제목은 “옷장 속 사람들”인데 영어로 “소사이어티 오브 클로드즈 Society of Clothes”여서 사람들이랑 소사이어티는 다른 개념인데 싶기도 하지만, 그 지점이 작품에서 서로 충돌하는 게 보여요.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해서 사회가 되는 건 아니고 그 안에서 내 역할을 해야지 사회가 되는 건데, 이 작품이 그 두 개가 계속 빗나가는 지점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재밌어요.
불어랑 한글 제목은 같은 뜻인데, 영어는 매번 조금씩 다른 뉘앙스로 가는 것 같아요.
사실 옷장 속에 있는 건 옷이지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 세계에서는 옷이 사람이라는 걸 제목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영어 제목을 짓는 시점에서 한국어와 불어 제목을 직역한 ‘피플 인 더 클로짓’이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클로짓을 워드롭으로 교체할까 여러 아이디어들을 논의하다가, ‘옷들의 사회’라는 제목이 나왔어요. ‘옷장 속 사람들’이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 제목이라면, ‘옷들의 사회’는 배경 세계관을 보여주는 제목 같아요. 둘 다 마음에 들어요.
호원: 성별이 다른 옷을 입고 아이가 어른 옷 입는 설정도 나오는데, 작품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다 여성 목소리여서 의도적으로 안 맞는 시점 정보를 주시는 거겠죠.
‘주인공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어!’라는 반응을 자주 듣게 돼요. 그의 성별이 나오지 않는데, 옷을 보고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데요. 그를 남자로 보는 시선이 사람을 옷으로 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의 선입견을 이용해서 실재의 그는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어요.
저 스스로 다짐하는 건데, 상대가 성별을 밝히기 전까지 상대방의 성별을 미루어 짐작하지 않으려고 해요. 독일에서 최근에 자기 성별을 스스로 바꾸거나 성별 없음을 선택할 수 있는 성별자기결정법이 발효되었다고 해요.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게 우선이라는 게 보여주는 바가 큰 것 같아요.
그 아이와 거울에 비친 여자의 모습이 닮아서 성인이 순수한 어린 시절 회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그게 그냥 인간 형태의 캐릭터인 건지 아니면 동일한 정체성의 인물로 의도한 건지.
말씀하신 것처럼 주인공의 어린 시절로 볼 수도 있고, 주인공의 영혼으로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만들면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들고 나니 다른 인물이더라고요.
아이들도 옷을 입는데요. 그 아이는 사회적 옷을 입지 않은 존재, 순수한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인물이에요. 옷들한테는 그게 충격이죠. 그 캐릭터의 영감을 받은 실존 인물이 있어요. 친구 딸인데, 시골에 살고 있어요. 종종 놀러 가서 같이 그림 그리고 자연 속에서 뛰어놀았어요.
그 아이가 직접 목소리를 연기했어요. 영화 후반부의 목소리는 아이 엄마고요. 둘 다 한 번도 성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정말 훌륭했어요. 영화 후반부에 목소리를 넣자고 제안하신 건 저희 음향 감독님이에요. 이주석 음향 감독님과 <의자 위의 남자> 때부터 거의 10년 동안 같이 작업하고 있는데, 이제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호원: 아이 포인트에서는 『벌거벗은 임금님』도 생각나더라고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모두가 옷이 있다고 하지만 없는 건데 이번에는 거꾸로 아이가 옷을 벗었는데 가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질색팔색하는 반응 보면서 재밌다 생각했거든요.
『벌거벗은 임금님』을 기획 단계에서부터 생각했어요. 순수한 아이가 허례허식을 고발하는 걸로요. 알아봐 주셔서 기쁩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해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투명 인간 같다가 퇴근하고 나서는 유령 같이 인상이 바뀝니다.
호원: 작품 구조로 보면은 집 안에서 현관 나가고 건물 내려오는 거 하고 엔딩이 거꾸로 집 밖에서 건물로 올라가다가 현관 보여주고 옷장으로 딱 이렇게 잘 맞더라고요. 원래 구조적으로 계산하고 작업하시나요.
네, 그렇게 계산하고 작업했어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인데, 영화 전체가 루프예요. 이야기 끝에서 주인공은 마치 자신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데, 똑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거죠. 그러면 그가 정말 자신을 찾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결말을 각각의 관객에게 맡기고자 했어요.
<빈방> 할 때도 마그리트 얘기를 하긴 했는데 그때는 카프카라고 그랬고 이번에 커피 마시는 장면 볼 때는 색깔까지 마그리트가 연상되었어요.
네, 이번에는 마그리트가 맞아요.
호원: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은 사과가 있어야 되는 건가 (웃음) 마그리트 모티브이면서도 결국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까지 가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기호 얘기인 것 같더라고요. 이 작품은 여러 번 볼수록 기호가 계속 미끄러지는 얘기구나.
이미지뿐만 아니라 마그리트의 작품이 의미하는 바까지 생각하셨나요?
의도한 게 아닌데 마그리트와 겹치는 지점이 많다는 걸 종종 느껴요. 마그리트도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림을 그렸잖아요. 저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해요. 내가 사용하는 매체 자체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시각적인 걸 통해서 시각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부분도 그렇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연결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작업을 할 때마다
그러게요. 할 때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시간과 관련해서 마그리트 <빛의 제국> 생각도 나는 게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시작하는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고 조명이 그대로예요. 루프를 위해서 의도한 건가요 아니면 원래 실내조명이라고 설정한 건 가요?
마그리트 덕분에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오종종 떠있는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게 되었어요. 이것은 실재인데, 과연 그럴까요? 라고 갑자기 서늘해지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어쩌면 많은 것들이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시간성이 사라지면서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주인공이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조명이 똑같은 건 영화 전체를 루프로 만들기 위한 장치인데요. 신기하게도 저는 그 조명이 아침에는 아침의 실내처럼 보이고 밤에는 밤의 실내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현관에서 나갈 때 컷 크기가 세 번 바뀌잖아요. 그러고 나서 완전히 바깥으로 전환되는 것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빈방>의 첫 장면이 모래 언덕 같은 이미지로 시작하는데요. 사운드로 그렇게 보이게 했어요. 우리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지가 변형돼서 이불이 걷어지면서 방 안에 있게 돼요. 그리고 다시 눈이 오면서 밖에 있고… 안과 밖이 계속 뒤집히는 걸 제가 재밌어해요.
영화는 평면의 제한적인 매체라 우리의 시선이 한쪽만 바라보게 되어 있잖아요. 그 제한적인 매체를 이용해서, 보는 사람의 관점을 뒤집거나 바꿔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영화를 만들면서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옷장 속 사람들>에서는 초반에 빈잔을 들었다 내리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장면 자체가 액자 속으로 들어가고, 또 현관문이 닫히면서 방 안에 있다가 바깥으로 확 나가게 돼요.
호원: <의자 위의 남자> 때부터 회전시키기도 하면서 공간을 되게 새롭게 바라보시는구나. <빈방>에서는 진짜 그 장면이 보이고 설치 작업에서도 그거를 쓰셔서 감독님 작품 보면서는 이건 2D가 아니라 3차원 공간 안에서 세팅이 된 상태로 보게 되더라고요.
네, <움직임의 사전>에서도 그런 부분을 신경 썼어요.
호원: 이번에 보면서 ‘저 작품은 스크린에서 안 끝날 거야. 이 작품은 스크린이 있는 벽과 이쪽 벽까지 다 생각을 하고 돌아가겠지’ 하니까 진짜 그래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 부분이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번안 같은 부분이기도 한 거죠.
호원: 감독님이 라이브 액션으로만 작업을 했다면 그거를 모를 수도 있는데 이걸 그려서 애니메이팅을 하다 보면은 결국 내가 그리는 것과 대상 사이에 일치가 안 생기잖아요. 기호랑 대상 사이가 끊어지고 미끄러지는 설정 같아서 재밌었어요.
그리고 만드는 동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사회에서는 얘네가 사람이잖아요”
첫 장면 구성을 보면 깨진 화분에 마른 식물이 있고 옷걸이에 세탁소 비닐이 걸려 있고 비정형의 거울에 마네킹 토르소 그리고 돌이 있어요. 화분은 다른 데로 옮겨 다니기도 하고요. 식물을 곳곳에 쓰는 이유가 있나요?
이 사회에서는 얘네가 사람이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모방한 세계라, 여기에 있는 것들이 거기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식물을 넣었어요. 그런데 그 식물들이 말라 있고 관리가 안 돼 있고 생명을 잃어가는 모습으로요.
호원: 그래서 작품이 더 초현실적인 것 같아 보여요.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흔히 쓰는 오브제 중 하나가 화분이에요. 화분이 말라죽거나 뜬금없는 기후의 식물이 있는데, 이 작품 중간중간에 배치되는 거 보면 눈이 계속 뭔가를 쫓게끔 만드는 작품이었어요.
호원: 건물 내려올 때 보면은 방들 각각 재미있는 설정이 있는데, 저는 이 캐릭터가 궁금했었어요. 빨래가 덜 마른 건가 아니면은 오한증에 다리를 떠는 걸까.
저는 꼿꼿이와 흐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었어요.
쟤 이름은 흐물이가 맞아요. (웃음)
영화제 가면 관객들이 항상 물어보세요. ‘저건 뭐예요’라고.
호원: 얘가 집에 있을 때 또 다른 사람이랑 실랑이해서
외투 하나를 서로 입으려고 하는데, 얘가 빼앗겨서 걔가 입고 나가고
호원: 그랬는데 작품 속에 얘가 계속 나오는 거야.
얘가 흐물이고 걔는 줄무늬거든요. 애니메이팅을 하면서 흐물이의 캐릭터가 구체화되었어요. 항상 이렇게 안쓰럽고 우울한 캐릭터로요. 옷에 있는 무늬를 생각하고 그린 거예요. 모든 캐릭터가 옷의 형태로 되어있지 않고, 옷은 옷인데 무늬만 있거나 이렇게 흐물흐물한 형태로 되어 있거나. 군중 장면에 보면 이런 캐릭터들이 더 있어요. 작은 점들로 되어 있는 캐릭터도 있고 리본으로 되어 있는 캐릭터도 있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추상적으로도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호원: 사람들 안에서도 일종의 계급이나 그룹이 있어요. 여전히 장갑과 신발이 서툰 사람과 장갑이랑 신발을 신었는데 모자를 얼마큼 안정적으로 쓰느냐 못하느냐 그런 하이어라키가 있어서 그 안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들도 보여요.
맞아요.
계급이 그렇게 뚜렷하게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다 같은 집에 살고 고층 아파트에 살아도 버스 타고 다니고.
호원: 사회학 개념이긴 한데, 계급은 아니더라도 계층.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아니라 결국은 등급별로 그다음으로 올라가야 되고
그 아이디어가 확실히 있기는 해요. 두 번째 챕터에서 잘 보이게 하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나 봐요.
호원: 장갑을 끼려는 집단이 있고 이 집단 바로 옆에 모자를 쓰려는 집단이 있고.
맞아요. 사람들이 모자에 대한 상징을 잘 알잖아요. 권위라든지 지위를 나타내는. 실은 장갑이 없는 캐릭터 중에는 모자를 쓴 캐릭터가 없어요. 장갑을 먼저 껴야 그 손으로 모자를 잡을 수 있어요.
신발, 장갑, 모자 이렇게 되나요?
장갑, 모자, 신발인데, 실은 이 애니메이션에 신발을 신은 캐릭터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옷들이 걸어 다닐 때 발소리가 나지 않아요.
호원: 모자를 쓰는 장면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겨주려고 하는데 서로 안 맞는 게 있었죠.
거기까지만 해도 주인공은 계속 남자라고 확신을 하게 되잖아요.
호원: 힐이 안 나오고 구두가 나와서
“서울처럼 보여주고 싶긴 했어요”
배경이 딱히 어디라고 할 수는 없는데, 마지막에 버스가 도착할 때 보면 번호판이 서울 98 0206이예요.
그건 배경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 생년월일이에요.(웃음)
사실은 더 서울처럼 보여주고 싶긴 했어요. 내가 일하는 곳은 서울이고 더 서울처럼 보여주고 싶었는데, 중절모 때문에도 그렇고 마그리트가 연상되니까, 서울처럼 안 보이는 건 조금 아쉬운 부분이긴 해요.
호원: 저는 서울이라고 안 봤어요.
그게 상대적인 게 프랑스 라인 프로듀서가 휴가 차 서울에 놀러 왔거든요. 서울 돌아다닌 다음에 저한테 네가 이거 왜 만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했어요.
호원: 그래요? 저는 서울 사람이 아니라 경기도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 버스 정류장은 저렇게 밤에 휑하지는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경기도에 살거든요. 거기는 경기도 맞아요. (웃음)
호원: 도시는 서울 맞아.
도시는 서울, 집은 경기도예요.
““NFB는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인 것 같아요”
호원: 음악이 되게 다르게 들렸어요.
NFB 스타일인 것 같아요.
호원: 합창 같은 목소리는 프랑스 쪽이에요. 아니면 캐나다 쪽이에요?
캐나다. 음악 감독이 캐나다 사람이었어요.
호원: 중간에 첼로로 난해한 음 연주한 것도 있었고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에서 후반 작업을 다 하기 때문에, 음향 감독과 음악 감독을 다 캐나다 사람으로 하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저희 음향 감독님 하고 꼭 같이 해야 한다고 데리고 갔어요. 그동안 저의 모든 애니메이션의 소리를 만들어주신 분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꼭 함께 경험하고 싶었어요.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폴리 작업을 가장 먼저 했어요. 첫째 날 NFB에 출근해서 폴리 아티스트인 카를라 바움가드너를 만났는데, 캐리어 가득 다양한 종류의 옷을 가지고 중절모를 쓰고 나타나셨어요. 말 그대로 ‘멋진 사람’이라는 말보다 이 사람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없는 것 같아요. 체력이 엄청나게 좋으신데, 매일 호수를 수영하고 암벽을 탄다고 들었어요. 폴리 작업을 하기 위해 물건을 들고 반복해서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제 체력이었으면 점심쯤 나가떨어졌을 것 같은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결같았어요. 마음이 열려 있고 너그럽게 수용하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제 인생 롤모델인 것 같아요.
이틀 동안 한 장면, 한 장면 옷들의 연기를 하셨어요. 옷 소리가 거의 비슷비슷하거든요. 옷 소리의 차이로 캐릭터의 차이를 만들어야 해서, 사운드 작업이 저희 모두에게 도전이었어요. 창의적이고 재밌는 제안을 많이 해주셨어요.
녹음 엔지니어 제프리 미첼은 놀랍도록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소리의 미세한 디테일을 조정해서 원하는 소리를 정확하게 구현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인데, 타인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유머러스했어요. 목소리가 정말 부드러웠는데, 스스로 내는 소리를 섬세하게 조절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들 베테랑 전문가였어요. 이분들과 작업하면서 제가 엄청난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음향 감독님이랑 저랑 매일 감탄했던 것 같아요. 전문성은 단지 일을 하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자세, 협업하는 분위기에서도 온다는 걸 배웠어요. 너무나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 작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음악감독 네 집으로 놀러 가는 거였어요. 오랫동안 한국과 캐나다로 떨어져서 온라인으로 회의하면서 작곡을 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일단 인간적으로 서로 만나자는 마음이었어요. 그 후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어요.
아까 현악기 파트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 부분은 아예 작곡을 하지 않았어요. 옷들이 장갑과 모자와 신발을 끼려고 할 때 나오는 음악인데,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자를 세 명씩 섭외하고 그 자리에서 장면을 보여 드리고 즉흥연주를 부탁했어요. ‘합주를 하기 위해 톤을 아름답게 맞추고, 연주가 시작되면 불협화음이 일어난다’는 콘셉트만 있었어요.
메인 캐릭터가 집을 나설 때 나오는 첫 번째 음악과 엔딩 음악은 동일한 멜로디예요. 첫 번째는 악기로 연주했고 엔딩은 목소리로만 노래했어요.
호원: 앞에서 공연을 본 거 아니에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거의 매일 구경하러 출근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여기서 작업하는 분들이 나이가 많고 굉장한 전문가들이라는 점인데요. 저희가 작업한 폴리, 사운드이펙트, 음악을 마지막에 믹싱 하신 장 폴 비알라르는 완전 요다 같은 분이었어요. (웃음)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그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음향감독님이 말씀하기로는 한국에서는 나이가 들면 이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어지는데 여기서 희망을 보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모두가 그들의 연륜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들 서로의 작업을 존중했어요. NFB는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인 것 같아요. 그 안에 속해 있으면서 넘치는 응원과 용기를 받았어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안 가장 큰 격려와 지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NFB는 사운드를 돌비 애트모스로 제작해요. 7.1.4 채널인데요. 저희가 믹싱 했던 극장은 서른세 개 정도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어요. 아카데미 시상식의 돌비 극장과 동일한 사운드 환경이라고 하는데요. 이걸 구현하는 극장이 잘 없으니까, “여기서 듣는 게 거의 마지막일 거야”라는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정말 그 후로 영화제에 갔을 때 듣는 소리는 완전히 다른 소리여서 아쉽긴 했어요.
캐나다에 한 달 이상 있었고 믹싱 끝나고 NFB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해달라고 부탁하셔서 했었어요.
음향 감독님, 음악 감독님, 저 그다음에 NFB 프로듀서, 라인 프로듀서 이렇게.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호원: 음악을 이렇게 한 번 맛보면은 그다음부터는 이 밑으로는 못 내려갈 텐데
근데 다른 작업 할 때도 음악 너무 좋아했어요. <움직임의 사전>의 김해원 감독님 음악도 너무 좋았고 <의자 위의 남자>, <빈방>의 마상우 감독님 음악도 정말 좋았어요. 환경이 더 좋은 거지 음악이 우위에 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호원: 이거는 말 그대로 뮤지션들의 잼처럼 실황을 듣는 거여서 그게 주는 공간감이라든가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그 느낌이 있잖아요. 그게 작품에도 반영이 되는 건데, 앞으로도 좋은 음악이 들리겠죠.
네, 그리고 저희 음향 감독님이 돌비 애트모스를 작업해 보신 적이 없었는데, 캐나다 가서 경험해 보시고 앞으로 이사할 작업실을 돌비 애트모스로 세팅하신다고 했어요.
타이틀 디자인도 좋은데, 글씨도 그렇고 단추 그림도 같이 해 주신 건가요?
같은 분이 그리신 거예요. 김현진 디자이너라고 요즘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에요.
호원: 타이포 전문
네, 레터링 전문. 소개를 받아서 작업을 했고 너무너무 마음에 들게 나왔습니다.
바람의 움직임처럼
실이랑
호원: 실, 바람, 구름
제목 주고 어떻게 주문하셨나요?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분이 많이 물어보셨어요. 그리고 글자가 어떤 느낌이었으면 좋겠는지 형용사로 물어보셨어요. 시안을 두 개 만들어 주셨는데, 제가 빨리 이걸로 골라버렸어요.
처음에 거울 앞에 액자가 있잖아요. 리본 같은 게 막 늘어져 있기도 하고 실패도 두 개 있고. 근데 액자 속에 찢어진 사진 같은 게 들어 있어요.
그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용이 비어 있어요. 테이블 장면에 걸려 있는 액자는 사진이 아예 없어요. 그런 식으로 빈 액자를 소품으로 쓰려고 했는데, 동일하게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찢어서 넣어놨어요. 뭔가 비어 있다는.
호원: 그러니까 <빈방>의 유니버스가 계속 이어지는 거.
네, 있다가 없어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작품 보면 <빈방>이 떠오르긴 해요. 그래서 <빈방>을 한 번 더 보게 되고
호원: 작품마다 기존 거를 부정을 하거나 그걸 계속 갖고 가면서 디벨롭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감독님 작품은 시간에서부터 시작해서 공간 얘기를 하고 시공간 얘기를 하고 움직임 얘기를 하고 비어 있는 거 하고 이번엔 또 비어 있는 곳에 기호. 이렇게 차곡차곡 쌓이면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확장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작업이 끝난 거는 언제였죠?
2024년 3월, 올해 초에 끝났어요.
너와 나는 같은 걸 보고 있었어 (2024)
윤석철트리오 <너와 나는 같은 걸 보고 있었어> 뮤직비디오는 <옷장 속 사람들> 끝나고 들어가신 거예요?
네, 맞아요.
2023년 9월에 ‘프라다 모드’라는 전시에 참여했어요. 씨네콘서트를 해보고 싶어서 윤석철 씨한테 처음 연락 드리게 되었어요. <나무의 시간>부터 <움직임의 사전>까지 기존 사운드를 빼고 영화를 무음으로 틀어놓고 윤석철트리오가 즉흥연주를 했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이때 윤석철 씨와 인연이 생겼고 몇 개월 후 새 음반을 내신다고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옷장 속 사람들>에 나온 것 같은 동그란 거울이 또 등장하잖아요. 뭔가 연관성이 있나요.
연관성은 <빈방>과 더 있는 장면인 것 같아요. 장면이 돌아가면서 다르게 보이는.
윤석철 씨가 우리가 같은 걸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완전히 다른 걸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경험을 곡으로 만들었다고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은 걸 보고 있는 두 사람이 카메라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하나로 겹쳐지기도 하고 둘로 분리되기도 하는 연출을 상상했어요. 두 사람도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들을 보고 있는 우리의 시점에 따라서도 그들이 다르게 보이는 거죠.
김진만 감독님을 섭외하셔서 미셸 공드리 영화처럼 만들었어요.
처음에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하기로 했는데, 안테나 내부 회의에서 연주 장면을 실사로 넣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윤석철 씨가 그 얘기를 하러 어느 저녁에 급하게 저희 작업실에 오셨어요. 제가 픽실레이션이라는 게 있다고 알려드리고 여기서 바로 의자에 앉힌 다음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드렸어요. 너무 재밌어하셨어요.
근데 제가 픽실레이션을 작품으로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진만 감독님한테 부탁을 드렸어요. 그리고 영화 <우리들>(2016, 감독: 윤가은)의 민준원 촬영감독님이 대학 선배라 촬영을 부탁드렸어요. 마침 민준원 감독님이랑 김진만 감독님이 아는 사이여서, 빠듯한 일정에 힘든 촬영이었지만 재밌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 2D 애니메이션을 다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고치라고 한 거예요.
아니요. 프리프로덕션 중에요. 제작 기간은 프리프로덕션이 한 달, 프로덕션이 두 달이었어요. 제작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픽실레이션 촬영을 했어요. 애니메틱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준비를 최대한 꼼꼼하게 해서 하루 동안 촬영했어요.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상태인데 중간에 들어와서 그 부분은 작화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원래 연출하고는 달랐다는 거죠.
네, 그런데 뮤직비디오가 ‘너와 내가 같은 걸 본 걸까’라는 내용이기 때문에, 픽실레이션 파트에서도 드럼스틱이 파가 됐다가 파리채가 됐다가 하면서, ‘내가 뭘 본 거지’라는 느낌을 이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옷장 속 사람들>도 그렇고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제가 작품에 참여하는 영역이 줄어들고 다른 분들이 참여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게 굉장히 재미있고 풍부하고 삶적으로도 더 행복한 지점이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애니메이팅을 직접 하는 중에 발견하게 되는 게 있는데 그게 없어서 아쉽긴 해요.
“제가 T와 F의 중간에 있는 F거든요”
그러면 이다음 계획은 어떠세요?
그래서 이다음에 그림을 직접 그리려고 해요. 작업이 끝난 지 꽤 됐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이미 다음 걸 시작하고 있었을 텐데 <옷장 속 사람들> 만들고 나서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요. 작업을 급하게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돼서 놀고 있어요. 글을 쓰고 있는데, 이전에 만들었던 작업들도 글로 정리하고 있어요.
내 작업에 대한 논문 같은 건가요?
논문은 아니고 제작기 같은 건데 그냥 재밌어서 시작했는데 재밌어서 계속 쓰고 있어요.
글로 정리를 하면서 그때 생각이나 현재의 생각이 나오게 되나요?
네, 그때 생각도 나오고 지금의 생각도 나오고 그러면서 앞으로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돼요. 장편을 시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표현적이고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을 먼저 하고 싶어요.
야수파 같은?
추상과 구상의 중간에 있으면서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추상과 구상이 왔다 갔다 하는. 이미지가 합쳐졌다가 흩어졌다가… <옷장 속 사람들>이 형상이 구체화되어 있고 여태까지 만든 애니메이션 중에 서사가 가장 길기도 해서, 오랫동안 그걸 작업하다 보니 실험적이고 즉흥적인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목말랐던 것 같아요.
호원: 감독님이 다양한 모습이 있잖아요. 한편으로는 <나무의 시간>부터 바슐라르의 문장을 가져오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의미 해석을 집어넣는 것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쌓아가는 것도 있어서 이번 거는 되게 감성적이네 이번 거는 되게 논리적인 거네. 이렇게 스윙처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 하는 게 있어요.
제가 T와 F의 중간에 있는 F거든요. <나무의 시간>이 F고 <의자 위의 남자>가 T로 갔다가 <빈방>이 F로 갔다가 <움직이는 사전> T로 갔다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옷장 속의 사람들>을 하면서 학교에 취직을 하셔서 시각디자인과에서 가르치시는 거죠?
시각디자인과에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전공 교수로 있어요. 학부에서는 애니메이션 수업을 더 많이 하고 대학원에서는 일러스트레이션 전공도 같이 해요.
국내 감독님들도 그렇고 외국 감독님도 초청하셔서 특강 하시잖아요. 그 특강은 어떤 수업에서 하나요?
‘작가적디자인스튜디오’라는 수업인데, 고학년 수업이 수업목표에 따라, ‘사회문화적디자인스튜디오’, ‘기업적디자인스튜디오’, ‘작가적디자인스튜디오’ 이렇게 나뉘어 있어요. 매체는 어떤 걸 다뤄도 상관없어요. 작가로서의 디자이너; 콘텐츠를 직접 만드는 저 같은 사람들을 한 학기에 한 번씩 초대해요. 동료 감독님들, 작가님들 새로 알게 되면 바로 초대했어요. 제가 그분들한테 배우고 싶어서 하는 수업이기도 해요.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작가들과의 일상적인 교류가 있나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화제에 가서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고 오랫동안 못 보면 그리워요. 전 세계에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소수잖아요. 1~2초를 그리기 위해 하루종일 작업하고 오랜 시간 한 작업에 몰두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최근에 슬로베니아의 아니마테카에 갔어요. 애니메이션 상영관 나오자마자 로비에서 매일 밤 파티를 해요. 매일 같은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니까, 어디로 흩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관객이든 학생이든 감독이든 오는 사람들이 다 친구가 되는 페스티벌이었어요. 이번에 더 많이 친해진 감독이 스펠라 카데즈예요. 슬로베니아에 해발 3000미터 산이 있는데, 이틀 동안 같이 걷고 산장에서 자고 여행하고 그랬어요. 마이클 프레이도 슬로베니아에서 다시 만나서 집에 초대해 주었어요. 요리도 직접 해주는 다정한 친구예요.
올해 안시에서 포르투갈을 초청하면서, 바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소개했는데, 아니마테카에도 이 친구들이 와서 스튜디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소개해 줬어요. 스튜디오 멤버 전체가 몇 명인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멤버들이 모든 역할을 돌아가면서 해요. 예를 들어, 이번에 이 사람이 감독하고 저 사람이 프로듀서, 얘가 애니메이터, 쟤가 클린업, 컬러…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다음 작품 할 때는 역할을 바꿔서, 쟤가 감독, 얘가 프로듀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통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프로듀서를 잘하면 계속 프로듀서를 하는 게 유리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얘는 프로듀서 역할을 잘 못해도 잘하는 사람이 가르쳐 주면서 모두가 모든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더라고요. 아무리 성공한 작품을 만든 감독이어도 다른 사람이 감독할 때 클린업을 하고요. 모두가 모든 역할을 이해하니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공평하고 민주적이었어요.
호원: 애니메이션 하다 보면은 저런 얘기하면 “넌 너무 이상적이야” 하는 건데
완전 이상적인 건데, 그걸 해냈더라고요. 처음에는 느렸지만 같은 믿음을 가지고 모두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스튜디오를 만들어 낸 거죠. 포르투갈이 제작 지원금이 커서 가능한 점도 있어요. 제작 지원비로 스태프 월급을 다 줄 수 있기 때문에, 공동 제작을 하지 않아도 포르투갈 내에서 제작이 다 가능하다고 해요.
쑥부쟁이는 학교 동문 친구들
다 동문은 아니에요. 쑥부쟁이는 코로나 때 메타버스 작업실을 같이 한 친구들이에요.
스튜디오 슷은 망원동 작업실을 같이 쓴 친구들이죠. 멤버는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변하는 건가요?
네, 스튜디오 슷은 계속 변해요. 모여서 각자 작업하면서 같이 뭔가를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프로그래머가 되서 같이 보고 싶은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여름에는 ‘슷슷한 밤’이라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스튜디오 멤버들의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열었어요. 연말에는 저희가 한 해 동안 작업한 걸 서로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는 파티를 해요. 올해에는 매달 다르게 멤버들이 하고 싶은 다양한 이벤트를 하기로 했어요. 저는 혼자 작업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같이 모여 있으니까 재미있고 좋아요.
코로나 이후부터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 국내 여행을 계속 다니면서 여러 지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어요. 지역마다 귀촌 공동체도 가보게 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지를 경험하고 배워요. 제 성향이 그분들 하고 가까운 것 같아요.
일주일에 두세 번 독서 모임을 하셨는데, 지금도 계속하고 있나요?
학교에 들어가면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모임만 계속하고 있어요.
대신에 산을 열심히 다니시는 것 같은데
계속 조금씩 바뀌지만, 산 같이 타는 친구들이 있어요. 취미가 많이 생겼는데 <움직임의 사전> 만들 때까지 작업 너무 많이 해가지고 사실은 되게 지쳐 있었어요. 경력이 쌓였지만 마음이 텅 비어 있었던 것 같아요. 일을 덜 하고 삶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산에도 많이 가고 올해 마라톤도 하고 수영도 하고 있고 새로운 춤을 배우기도 하고 요가도 계속하고 여행도 자주 가고 있어요. 여러 가지를 다 취미처럼 계속하는 걸 좋아해요.
호원: 이제는 감독님이 생각하는 옵티마이즈 된 작업 속도랑 작업 주기 같은 게
없는 거 같아요.
호원: 흘러가는 대로
네. 현재는 그런 것 같아요.
인터뷰 2024년 12월 30일 @ 망원동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