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 FOCUS_HUR Bumwook
덤벼라!
애니메이션을 상대하는 허범욱 분투기

“통성명은 됐고, 일단 맞고 시작하자!”
그의 첫 작품은 딱 이런 인상이었다. 2009년 당시, 구 태권 소년이자 한때 시인을 꿈꿨던 청년은 우여곡절 끝에 <평범한 식사>를 만들었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대괴수, 아무래도 감독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채워지지 않는 괴물의 허기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갈망과 닮아 있다. 제목과 달리 ‘평범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퀄리티가 비범하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와서 평가하자면 꽤나 풋풋한 도발이다. 하지만 괴랄한 첫 작품을 만드는 일이 허범욱에게만 특별히 한정된 경우는 아니다. 의욕 충만한 첫 작품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야심 찬 등장 이후,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경로에서 차별점이 발생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고, 은퇴작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졸업 작품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들을 힐난하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건 만만하지 않다는 얘기다. 첫 작품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두 번째 작품인 법이다.
허범욱은 꿋꿋하게 두 번째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도 만들었다. 그게 무려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그런 다음 네 번째 작품을 만들었다. 다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작년에 다섯 번째 작품이자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대략 15년 동안 구축된 그의 필모그래피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다섯 편이라는 작품 수에 다소 아쉬움이 생기는가? 단편과 장편을 오가는 것에서 혼돈을 느끼는가? 두 편의 장편 제작에서 경이로움을 갖게 되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면 허범욱에게만 해당되는 사례는 아니다. 이성강, 장형윤, 연상호, 한지원... 이들 감독은 저마다 처한 환경과 창작의 경향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허범욱 이전에 이미 자신들의 방식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단편과 장편 사이를 오가며 작업을 해왔다. 출발점은 다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허범욱이 독특해 보이는 까닭은 그가 애니메이션 전공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 있지 않다.이성강, 장형윤, 연상호도 학부 전공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며, 현재 활동하는 독립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의 면모를 보면 전공 여부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다만 허범욱에 관한 이야기에는 애니메이션 입시에 ‘대차게 까인’ 젊은 날이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점이 허범욱을 특출 나게 ‘거친 녀석’처럼 보이게끔 한다. 매력적이라는 얘기다. 그 자신도, 그의 작품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 씬에서 대놓고 피칠갑 장면을 시도하는 ‘독한’ 인간을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폭력을 대하는 태도
폭력을 다루는 작품들은 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첫째, 폭력의 미학, 즉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거나 잔혹성 속에 깃든 ‘금기시된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제시하는 경우다. 둘째, 폭력의 기원을 추적하여 고발하는 것. 그래서 폭력이 단지 표면적 사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서 기인하거나, 개인을 넘어선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진단하려 한다. 셋째, 폭력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과 희생, 비극을 드러냄으로써 치유와 극복의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것, 다시 말해 폭력으로부터 출발하여 성찰에 이르거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에까지 도달하려는 시도.
허범욱은 이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들은 어느 한 지점에 정박하지 않고, 폭력에 대한 여러 입장들을 횡단하고 순환한다. <평범한 식사>는 제어할 수 없는 파괴의 역동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폭주하는 식욕이 중심에 있고, 그로 인해 잡아 먹히는 인간들과 박살 나는 도시의 건물들은 주변에 머문다. 이야기는 허기로 인한 폭력에 집중한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주변으로 밀려났던 도시와 희생자는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에서 제목을 만들고,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로부터 드러나는 것은 폭력의 운동성이나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희생자의 고통과 상처이다. 단, 이 작품은 겉으로 드러난 유괴 사건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대신, 인간의 내면적 상처에 대해 깊숙이 천착한다. 그럼으로써 범죄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부끄러움’에 대해 성찰해 낸다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 리뷰 참조).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가 폭력으로 파괴된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선량함’을 찾고자 하였다면, <창백한 얼굴들>은 선량함의 반대말(비정함, 냉혹함 등등)을 가족으로부터 사회로 확장시키는 한편, 사회적 문제로부터 가족의 문제로 그 원인을 좇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는 <평범한 식사>처럼 파괴적인 폭력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하나의 장르를 구축하면서도, 어째서 인간들이 온기를 잃은 ‘창백한’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비극적인 가족 드라마로 응축한 작품이 <갈라파고스>이다. 여기서 허범욱은 명확하게 폭력의 기원이 되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입시 중심의 ‘교육’, 성공을 압박하는 ‘가족’, 일상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앙’... 폭력의 구조적 재생산 기제를 정확히 적시하면서도, 이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극으로 풀어냈다. 비틀린 신앙 속에서 구원은 없어 보인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앞선 작품들이 제기한 문제를 다시 복기하면서, 이전의 모티프들을 재조직하였다 (예컨대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에서 유괴된 김영수 어린이 사건도 이 작품에 등장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거친 사건들은 폭력의 잔혹미를 한계치까지 물아 부친다. 그러고 나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폭력의 기원과 극복을 모색하다가, 마침내 구원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리뷰 참조). 양극단으로부터 하나의 수렴점으로 평행하게 다가가는 대칭적 플롯 속에서, 극의 후반부는 폭력으로 인한 몰락과 폭력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대조적인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부각한다. 인간이 되고자 한 돼지들이 비정한 살육극으로 치달을 때, 짐승이 되고자 했던 인간 주인공은 (잠시나마 자신의 환영 속에서 인간미를 느꼈던) 자살한 인간의 시체를 화장해 준다. 대사를 통해 힘주어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묵직하게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구원은 신앙적 믿음이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이처럼 허범욱의 애니메이션은 폭력을 중심에 두되,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난폭한 행위 자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의 주체를 통해 폭력의 기원을 좇고자 하며, 때로는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에 천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의 피해자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찾고자 한다. 어떠한 접근을 선택하든 그의 작품이 장르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 까닭은 현실 속 실제 사건들(유괴, 존속살인, 집단 내 가혹행위, 살처분 등)로부터 작품을 기획해 나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애니메이션으로 응답하는 것이 그간 허범욱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온몸에 퍼지는 고통
허범욱 작품에서 폭력이라는 문제는 단지 주제와 스토리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더욱 자극하거나 당혹게 하는 것은 폭력을 보여주고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다. 단적으로 허범욱은 총이 아닌 칼을 선호한다. 이를 그저 고약한 취향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총을 쏘려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반면 칼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총은 차갑게 피해자를 대상화하지만, 칼은 피해자의 온기를 느끼며 신체와 도구를 결합해야 한다.
그래서 허범욱의 작품들에서는 ‘육체성’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곤 한다. 유달리 크게 부각되는 손은 아름답기보다는 흉측해 보인다. 주름, 핏줄, 상처, 떨어져 나간 살점처럼 몸은 구체적인 사연을 이미 각인처럼 담아내고 있다. 뒤틀리고 비척대고 오그라들고 절룩대는 몸뚱이들은 ‘아직’ 살아있음에도 ‘이미’ 죽어가는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때론 이미 죽었어야 하는 것이 아직 살아 움직이는 좀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굳이 인물의 육체성을 드러내고, 기어이 칼이라는 흉기를 폭력적 행위의 도구를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폭력을 휘두르는 목적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총을 통한 즉각적인 살인이 아니라, 칼에 베이고 찔리고 찢겨 나가면서 고통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서서히, 그리고 오랫동안 전해지도록 하려는 설정. 이로써 고통이 피해자뿐만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관객에게까지 전이되도록 하려는 의도.
그러하기에 고통을 위한 폭력은 비단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휘두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허범욱의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자살은 자신을 향한 폭력이다. 이때 도구는 칼이 아니라 올가미, 목줄이 쓰인다. 자신에게 집행되는 교수형이라는 형벌은 이미 삶의 의지를 잃은 몸뚱이일지라도 허공에서 버둥거리게 만들다가 이내 축 늘어지게 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어째서 타인을 향한 폭력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폭력까지 다루어야 했을까? 게다가 단순히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과 감각을 필요로 한 걸까?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는 허범욱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질문들을 단숨에 풀어내는 열쇠로 봐야 할까?
그렇다면 가부장에 대한 분노와 경멸, 저주가 폭력의 기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틀린 말은 아닐 테다. 인용된 시 구절은 정확히 그 지점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하지만 시인을 꿈꾸었던 허범욱이라면 관객이 그저 시의 마지막 구절만 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지사, 굳이 자신의 작품 속에 특정 시를 등장시킨 이상, 관객들은 그 시를 찾아 온전한 한 편의 텍스트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실비아 플라스의 「아빠」라는 시의 전체는 아빠를 향하면서도, 그 아빠는 파시즘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적어도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에서, 나아가 허범욱의 작품들 전체에서) 폭력의 기원은 가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권력 체계가 작동하는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창백한 얼굴들>은 바로 그러한 근미래 사회를 상정한다). 파시즘이 개인을 향해 가하는 폭력, 개인이 파시즘에 적극 준동하면서 먹잇감에 휘두르는 폭력, 그리고 개인이 파시즘에 맞서는 저항으로써의 폭력.
“죽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는 그것을 기막히게 잘 해낸다.
나는 해낸다 그것이 지옥처럼 느껴지도록.
나는 해낸다 그것이 진짜처럼 느껴지도록.
그걸 나의 천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실비아 플라스의 글이다*. 허범욱의 말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다.

난폭한 애니메이션에 올라타다
애니메이션은 허범욱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학 전공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은 그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대학교, 전공이라는 제도는 그러했을지라도, 바깥에서 발견한 애니메이션은 매혹적이었다. 그가 NFB의 애니메이션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을 수 있지만, 그로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한 것은 스스로 개척해 나간 길일 테다. 그저 상투적인 평가는 아니다. 대학 전공 수업 때도 NFB 애니메이션을 다룰 수는 있지만, 이를 창작의 다음 단계로 이끌어내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허범욱은 NFB 애니메이션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그의 첫 작품 <평범한 식사>는 피터 폴데스의 <헝거>로부터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혹여 디지털 컷아웃을 이용한 애니메이팅이 다소 설익어 보일지언정, 실상 피터 폴데스의 작업 또한 당시 낯설기 그지없던 컴퓨터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이었기에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느낌의 애니메이팅을 선사하였다.
중요한 것은 허범욱의 작품들이 하나의 정형화된 틀 속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 이미지가 강렬하여 단번에 드러나지 않을 뿐, 그의 작품들은 매번 실험적인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새롭게 재규정해 나간다.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에서 추상 애니메이션을 내러티브 속에 과감히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어떠한 추상 작업도 쉽사리 해내지 못했던 내면적 심리 상태를 이야기에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NFB 책임자였던 노먼 맥클라렌의 작품들로부터 한 단계 더 올라간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창백한 얼굴들>에서 청부살인을 위해 저택에 침입하는 장면은 마치 네거티브 프린트와 그림자 연극, 80년대 비디오 게임을 결합시킨듯한 독창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습격을 위한 치밀한 동선 및 타이밍 계산이라는 스토리 요소는 말 그대로 신박한 연출을 통해 이 작품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갈라파고스>에서는 연극적 무대 설정을 도입하고, 여기에 스톱 모션 기법으로 캐릭터를 다루기도 하였다. 이로써 가족 잔혹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현실 속에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하지만 결국 벌어지고만 실제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가장 ‘연극적인 상황’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게 아니던가!
실험적 시도는 기존의 방식을 새롭게 도입하는 수준에 그치지는 않는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모션 캡처라는 최신 기술을 적극적이고도 과감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한 명의 연기자를 통한 모든 움직임 연기, 그리고 한 명의 성우에 의한 두 주요 캐릭터의 목소리 녹음을 시도하여 돼지와 인간의 수렴과 중첩, 또는 우리 자신의 다면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허범욱의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규범화된 제작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작품마다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언어로 흡수하는 실천 과정임을 증명한다. 특정한 제작 방식을 표준화하여 정답처럼 훈련시키는 기존의 교육 과정 (물론 담당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겠지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애니메이션 교육 제도를 과감히 떨쳐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다. (<갈라파고스>를 통해 고발하듯) 한국 사회처럼 ‘대학’에 사활을 거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 결정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 역시도 당사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의 시간이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카데미는 허범욱에게 대안적인 제도의 역할을 했다. 이후의 작품들이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여러 기관의 지원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도 평가할 지점이다. 모든 창작자를 만족시킬만한 이상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제작 지원을 통해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학 제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애니메이션을 경험하고 지속적으로 창작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건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허범욱이 그러한 시스템에 고분고분 안착하였다거나 순응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 작품마다 그에게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거나 타협, 양보,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에 매번 올라타서 험한 길을 질주해야 하는 시도와 같다.*** 사실 그러한 모습이 허범욱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기는 하다. 순탄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알싸한 매콤함, 마라맛 애니메이션은 허범욱이 우리를 위해 차린 평범하지 않은 식사이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중독성은 쩐다.

*최근 번역본의 전면 개정판으로 재발매된 앨 앨버레즈의 『자살의 연구』 중 1장 프롤로그는 바로 실비아 플라스에 할애되어 있다. 앨버레즈는 실비아 플라스의 사례로부터 출발하여 냉소와 고통, 자살과 폭력, 죽음 (그리고/그럼에도 다시) 삶에 대한 사유를 문학을 통해 진단하고 있다.
**한때 영국의 대표적인 실험영화 전문가 데이비드 커티스는 노먼 맥클라렌의 <Blinkity Blank> (1955)를 향해 “추상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내러티브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라며 평가절하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1979년, 당시까지의 추상 영화/애니메이션을 집대성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시 및 상영회였던 Film as Film: Formal Experiment in Film, 1910-1975에서 노먼 맥클라렌의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장편 <창백한 얼굴들>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창백한 얼굴들: 나는 왜 이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가』 (씨네21북스, 2013)는 단순한 제작 노트가 아니라 청년 허범욱의 삶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서전이기도 하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