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SPECIAL_LEE Moonjoo
문화산업 열풍이 불었던 90년대 대한민국, 생애 최초 컴퓨터를 갖게 된 미대생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양복 입은 직장인의 출근길 몽상을 그린 이문주의 첫 단편 <틈>은 1995년 11월에 나왔다. 같은 해 개설된 계원조형예술대학 애니메이션과로 졸업후 편입해서 팀 작업으로 <합창>(1996)을, 개인 작업으로 <머리 모양>(1997) 제작했다. 독일 유학 전 마지막 작업인 <낯설음>(2000)에는 학생 운동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폴 드리센이 출강하던 시절 카셀미술대학에서 2006년 <숨바꼭질 Hide and Seek> 2008년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My Rusty Dusty Head>를 만들고 귀국해 계원예술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등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쳤다. 2010년 <너의 근원>, 2012년 <괜찮아? 미쉘?>, 2016년 <미튼 Mitten>과 <어릿광대 매우매우 씨>, 2020년 <40>, 2024년 <뉴-월드 관광>을 내놓으며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반 현재 작품목록에 12편을 올린 이문주 감독과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의 지난 30년을 돌아봤다.
2024년 12월 스페셜: 이문주
세월과 역사
1990s 퓨처아트
홍대 회화과 다니면서 퓨처아트를 찾아가기 전에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셨나요?
아니요. 1994년 제가 3학년 때 매킨토시 6100이 나오고 나중에 오디오 비디오 입출력이 되는 애들이 나온 거예요. 그거에다 타블릿(이랑) 펜을 접했어요. 그 시절 우리 세대가 생각했던 그래픽이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한 그림들이잖아요. 근데 회화적인 느낌의 드로잉들도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포토샵도 있고 페인터도 있던 시절인데, 포토샵의 펜 툴을 사용해서 색도 섞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어요. 간혹 특선 만화 영화로 유럽 애니메이션들이 들어오는 경우들이 있었어요.
저는 케이블 방송 아트 채널에서 유럽 애니메이션 나오는 걸 봤거든요. 근데 감독님 때는 KBS 같은 공중파에서 봤다는 거죠.
일본 통해서 들어온다는 얘기들이 있었어요. 뭔가 때우기식으로 들어온 거였지 않나 싶어요. 도대체 그 선각자가 누구신지 모르겠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전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그때 엄마랑 그거 보면서 너무 매혹적이었던 거예요. 그거랑 유니콘 나오는 거**
*<The Pied Piper of Hamlin>(1981, Mark Hall , Brian Cosgrove)
**<The Last Unicorn> (1982, Jules Bass, Arthur Rankin Jr.)
호원: 비디오 시대 때 전설의 작품 같은 몇 개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라스트 유니콘>이죠.
몇몇 작품들이 기억이 나요. 엄마가 영상에서 피리 부는 장면을 흉내내면서 어떻게 손이 이렇게 움직이지? 하셨던 기억. 그러니까 현실에서 볼 수가 없는 이상한 것(움직임)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저게 뭐지? 인형이 움직인다라는 것도 너무너무 가슴 뛰는 일인데, 어렸을 때는 자기 인형이 살아있기를 바라잖아요. 얘네들이 살아있잖아. 인형이 살아 있네. 이걸 계속 마음을 갖고서 쭉 컸고 국민학교 때 만화잡지 『보물섬』을 열심히 보고 중학교 때 만화가게에 가서 열심히 만화책을 봤고 고등학교 만화창작반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대학을 온 거죠.
대학은 회화과로 왔는데, 만화나 애니메이션 과가 없어서예요?
그때는 만화를 전공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죠. 학과실에서 몰래 카피된 비디오들 많이 보잖아요. 그때 비디오 파는 아저씨가 있었어요. 그렇게 구입을 해서 예술 영화도 많이 보게 되고 애니메이션들도 많이 보게 되고. 그때 애니메이션들이 막 들어와서 <이웃집 토토로>(1988)랑 그때 막 엄청 볼 때죠. 일본 대중문화 개방(1998년 10월 20일)한 이후에도 보긴 했지만.
첫 컴퓨터가 맥
3학년 때 컴퓨터를 샀고, 그전까지는 집에 퍼스널 컴퓨터가 없었어요. 그때 아빠가 “우리 집도 컴퓨터를 사야겠어. 너한테 필요한 게 뭐냐” 그래서 매킨토시 6100AV를 산 거죠. 저도 컴퓨터를 할 줄 모르는데 DOS***보다 피씨처럼 MS-Dos 를 다뤄야하거나 하지 않고 맥은 되게 직관적이라 쉽잖아요.
***Disk Operating System: 1981~1995년 IBM PC 디스크 운영체계 약자
때마침 저는 그림 그리기가 너무 싫었고 3학년 2학기쯤 되면 전공 졸업 작품을 향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작품 규모도 커져요. 그전에는 정물을 놓고선 구상작업을 하던 걸 학교 분위기가 점점 추상을 하기를 원해요. 저희 학교 교수들이 다 추상 회화를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추상을 해야지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종용이 되거든요. 저는 추상을 못 그리겠는 거예요.
미술평론하시던 최열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CD롬을 만드는 게 점점 생길 때에요.
그분이 꿈꾸는 게 박물관을 CD-ROM**** 타이틀로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하이퍼링크처럼 계속 클릭해서 방에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Compact Disc Read Only Memory: 650~700MB 정도까지 저장 가능한 읽기 전용 디스크
지금이라면 메타버스겠네요.
호원: CD-ROM 타이틀 기반 버추얼리티 개념이 나오고 웹 기반이 되었다가 요즘에 메타버스가 된 거죠.
지금 같이 사는 박병래 씨랑 예술학과의 김영기라는 친구랑 판학과 친구 차혁호, 93학번 셋이 좀 친했는데, 김영기가 그런 거에 능통한 친구였어요. 최열 선생님하고 인연이 있어서 애들을 좀 꾸려봐라 이렇게 된 거예요. 제가 그때 남편하고 사귀던 시절인데 남편도 자취방 보증금을 뺐나 그래서 컴퓨터 하고 캠코더를 사고 “우리가 디지털 영상을 만들 수 있어”
열정이 느껴진다.
완전
호원: 촬영이고 뭐고 애플 주식을 샀어야 해. (웃음)
그게 퓨처아트랑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최 선생님이 미술 운동을 하셨던 분이고 미술 운동 하던 학생들이 만들어낸 창작 집단이 퓨처아트이기 때문에 연결이 된 거예요. 제가 4학년 때 인터넷이 막 만들어졌을 때예요.
호원: 95년이면 모든 게 한 번 확 뒤집어지는
저희는 엄청난 변혁 속에 있었던 거예요.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시작하는) 그러니까 디지털 네트워킹이 된다라는 거예요. 우리는 물질적이지 않은 거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손으로 만질 수가 없어. 저희 동기들은 다 그랬었죠.
그런데 난리가 난 거지. 인터넷도 만들지 CD롬이라는 이상한 거 안에 영상이 들어가고 그림이 들어가고 이런 상황이 된 거죠. 그전에 컴퓨터라는 거는 그냥 뭘 계산하는 거라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 거예요.
페인터가 드로잉이 용이하게 되는 툴이 있는데, 거기에 어니언스킨 기능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작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면서 재밌어서 막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95년도 겨울이었어요. 저는 96년 봄에 졸업이기 때문에 95년에 학과에서 작업한 걸 갖고 96년도에 졸업 전시를 해야 돼요. 저는 그때 제 캔버스 그림도 그리면서 동시에 그 작업을 했어요. 그게 제 첫 작품인 <틈>(1995)이에요.
당시에 노동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답답함, 자본 때문에 온전한 노동이 아닌 분절된 노동을 해야 되는 삶에 대한 거부감에서 만들어진 거죠. 그 사람이 잠깐 그 틈으로 과거를 상상할 때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하고 그림과 무언가를 등가 교환하고, 이런 화폐가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 거예요.
처음 만든 애니메이션이어서인지 이후 감독님 작업에 비해서 내용이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 시기에 치기 어린 내용을 담은 것 같아요.
그때 기술은 퓨처아트에서 배운 거예요. 페인터로 하는 것들, 프리미어도 출력을 어떻게 하는지 입력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퓨처아트에 데이터를 갖고 와서 VHS로 떴어요. 6100을 통째로 들고 갔어요.
외장하드가 없어서?
스카시*****라는 큰 걸로 연결되는 외장이 막 나올 때예요.
******SCSI (Small Computer System Interface): 컴퓨터 체계 결합장치
<틈>을 만들어서 졸업 전시회 한쪽 구석에서 영상을 틀었어요. 저 외에도 영상으로 작업을 하고 싶었던 선배 오빠랑 둘만 외롭게 놓고서 영상을 틀었었죠. 그게 제 첫 애니메이션이에요. 음악도 음악에 대해 이해가 높은 선배 오빠 통해서 멋진 음악 찾아서 넣었죠. 그때 인연이 돼서 퓨처아트에 그 들어갔어요.
그때 퓨처아트에는 어떤 분들이 계셨어요?
전승일 감독님이 대표셨고 나기용, 정동희, SBA 본부장이셨던 박보경, 김미선, 박한신 감독님, 조광희 감독님, 2000년대 초반에 굉장히 많이 활동하셨고 지금은 미국 회사에 계신 분이 신영재 감독님, 그리고 김미선 감독, 그다음에 신영재 감독님 하고 같이 서울대 서양화과에서 친하셨던 류영아 감독님이셨고 저 들어오고 난 다음에 김정화 감독님 들어오셨고 중간에 박소진 감독님이라고 계셨었고 그다음에 나중에 윤희동 감독님 들어오셨어요. 윤희동 감독님이 시카프(Seoul International Cartoon & Animation Festival)에서 큰 상(<월요일 Monday>로 1999년 SICAF 은상) 받으셨었어요. 그리고 강준원 감독도 들어왔던 걸로 기억해요.
퓨처아트는 얼마나 운영이 된 거예요?
제가 95년에 알았지만 존재한 거는 94년이나 95년 나기용 감독님 <서브웨이>가 95년쯤이죠. 1회 시카프.
호원: 감독님이 퓨처트에 들락날락할 때가 8월 전이었으면 아직 퓨처아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고 8월에 시카프에서 나기용 감독이 대상을 받고 나서는 퓨처아트가 기사에 나오고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정동희 감독님이 <오픈>(1996)으로 히로시마에 최초로 본선진출하고.
멤버들은 어디까지 활동을 했나요?
저는 2001년에 독일로 갔고 규모가 점점 줄면서 2008 전후에 해산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퓨처아트 활동하면서 제일 의미 있었던 활동 중에 하나가 워크숍이었어요. 손영득 감독도 와서 배웠죠. 90년대 말인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생기면서 퓨처아트가 스튜디오를 얻어서 들어갔어요. 그러면서 저희가 하던 워크숍을 애니센터 버전으로 만들었어요. 거기에 정승희 감독이 수강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김상화 감독님이나 손영득 감독님이나 지역에서 미술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기 때문에 다 연대하셨던 분들일 테고 그때 부산도 그렇고 대구도 그렇고 몇몇 지역에서 애니메이션 영상을 만드는 창작 집단들이 생겨 있었어요. 그래서 약간 특파 온 것처럼 와서 배워가는 이런 느낌으로 하셨었죠.
저는 퓨처아트 와서 디지털로 어떻게 작화를 해서 편집하는지는 배웠지만, 다른 분은 거의 로토스코프를 이용해서 작업을 하셨어요. 기본적으로 회화 전공이 많으셨는데 서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편집해서 리터칭에 의미를 두는 거죠. 근데 저는 그 시절의 로토는 별로 재미를 못 느꼈었고 작화를 하는 게 더 재미있었거든요. 퓨처아트에서는 작화를 배울 수가 없잖아요. 제가 1996년에 졸업을 하고 바로 계원 애니메이션 학과로 편입을 했어요.
머리 모양(1997)
호원: 계원도 생긴 지 1~2년
97년에 1기 졸업이었어요. 그러니까 95년에 생긴 거지.
호원: 95년에 온갖 일이 다 벌어졌어요. 시카프 처음 시작했고 계원에서 1기 시작하고
그때 픽사 디즈니 현대자동차 이 트라이앵글 뭔지 아시죠?
호원: <주라기 공원>
“우리가 돈 벌 길은 이곳이다” 해서 지원이 쏟아진 거죠. 이제 자동차 파는 게 아니다 이걸로 돈 벌 때다 하고 있을 때니까 덕을 봤죠. 2학년으로 편입을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졸업 작품을 해야 됐어서 만든 게 <합창>(1996, 이문주, 이주희, 임소향)이에요. 시간이 너무 없는 상황에서 뭘 만들려니까 “난 디지털 작업을 할 줄 아니까 우리 디지털 작업으로 하자” 우리 배운 대로 작화하더라도 그걸 스캔 디지털화해서 채색하면 훨씬 빨리 할 수 있을 거다 한 거죠. 어떤 거는 손 채색 어떤 거는 디지털 채색 이런 식으로 만들었더니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더라고요. 2학기 때는 할 게 없는 거야. 그래서 2학기를 안 다녔어요.
계원은 그때도 졸업작품을 팀 작업으로 했어요?
네. 그때 오성윤 감독님 하고 채윤경 교수님한테 스토리보드 짜는 법을 잘 배웠고 오성윤 감독님을 통해 작화하는 법을 좀 더 많이 배웠어요 졸업은 못 했는데 졸업작품은 했죠. <합창>이 96년 대한민국영상만화대상에서 동상을 받았고 97년 시카프에서 음악상을 탔어요. 그리고 제가 또 만들었던 <머리 모양>이 캐릭터상을 받았죠. 이제 나는 감독이 된 것 같았죠.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나온 거예요. 제가 두 번째 받은 것 같아요. 그때 500만 원을 받아서 만든 게 <낯설음>이었는데, 진짜 엉망이죠.
호원: 정작 퓨처아트 안에서 한 작품은
<머리 모양>
<머리 모양>은 유니세프 어린이 인권 애니메이션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때 전승일 감독님이 저희한테 뭐가 들어왔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서 일을 한 거였거든요. 저하고 미선 언니하고 누구 3명인가 2명인가 했었어요. 정작 어떻게 쓰였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재밌게 기분 좋게 만들었어요. 박정호 씨가 음악 해주셔서 실제로 처음 맞는 음악을 처음 딱 넣어서 해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초반은 밝고 직접적인 이야기들을 했었어요.
호원: 딱 꿈 많은 애니과 전공 1, 2학년 생
그렇죠. (웃음)
낯설음 (2000)
호원: <낯설음> 제작연도가 2000년인가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해넘이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99년에 지원을 받았고 제가 결혼을 하고 만들었어요. 그거 만들 때가 제가 독일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였어요. 디지털 기술도 배웠고 작화 기술도 배웠는데, 연출을 배우고 싶은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애니메이션은 연출을 가르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죠. 상업 애니메이션은 아니었으니까. 저는 미국 애니메이션은 옛날부터 별로였고 유럽 애니메이션을 선호했기 때문에 유럽을 가야겠다.
갑자기 목탄으로 흑백 작업을
그것도 100% 페인터예요. 그거는 저의 어떤 무의식 같은 것을 담은 거죠. 항상 내 얘기를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막 만들다가 어느 시점에 ‘내 얘기를 하자’ 이런 시점이 오는 것 같아요.
호원: 내 얘기라고 하기에는 80년대 프락치 사건을 다루는 그런 얘기 같아가지고
그건 아닌데, 학생운동을 조금 하긴 했어요. 제가 92학번이니까 심각하게 할 수 있었던 시대도 아니었고 관여를 조금 하고 집회도 나가고 그랬었는데, 그때 겪었던 어떤 충격이나 경험들이 잠재해 있었죠. 마음속에 울분으로 쌓여 있기도 하고 약간 트라우마 같은 것들도 있었고. 근데 거기서 주인공이 어딘가를 통해서 들어가고 가자마자 누군가 뭘 하라고 시켜요. 그래서 그거를 지켜야 되는데 계속 검은 개가 나타나서 방해를 하잖아요. 그러다가 굉장히 폭력적인 상황이 되죠. 그래서 이것도 잃고 모든 게 다 해방이 된 것 같지만 마지막 중간에 달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날 보고 웃고 있잖아요. 그게 제 꿈속에 가끔 나왔던 어떤 이미지들, 시대에 많이 눌렸던 어떤 마음을 담은 거죠.
원래 회화 작업은 어떤 스타일이었어요?
저는 모노톤이었던 것 같아요. 컬러풀하지도 않고 역동적이지도 않고 색깔을 많이 쓰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재료는 뭐 유화, 아크릴 둘 다 썼었죠.
호원: <낯설음>에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을 뒤집어서 깐 거는 의도적인 거죠.
제 성향인 거죠. 직접적으로 그걸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도 모든 영화에서 폭력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사건의 이야기만 이해할 수 있게 존재하면 될 것을 사운드까지 넣어가지고.
호원: 뒤집어 놨는데 진짜 폭력적이기는 해.
멀리서 그나마 하려고 했죠.
2000s 카셀
2001년에 독일로 가셨어요. 카셀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퓨처아트에 계셨던 조광희 감독님이 독일을 먼저 가신 거예요. 그분도 서양화 전공인데, 애니메이션 하려고 가셨어요. 카셀 대학에 다니고 계셨고 거기에 폴 드리센(Paul Driessen)이 있었던 거죠. 거기에 솔깃한 거예요.
물론 독일은 학비가 없고 남편은 미디어 아트 쪽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집합인 독일로 가자고 한 거죠. 가긴 갔지만 시험 다 끝날 때쯤 가서 거의 1년을 꼬박 다른 지역에서 어학을 먼저 하다가 2002년에 입학을 하게 됐죠. 카셀을 갔더니 조광희 감독님이 졸업반이셨고 그다음에 한국 감독님 중에 정말 훌륭하신 분이 정혜경 감독님이라고 계세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작업을 좀 하시다가 이제 아예 안 하세요. <드로잉 더 라인>(2006)이라는 작품이 하나 있고 <소파>(2002) 두 작품 있었어요.
카셀에서 하신 거죠.
두 작업 다 카셀에서 했어요. 작화도 너무 잘하시고 되게 유머러스한 데다가 폴 드리센 영향도 많이 받았고 굉장히 날카로웠어요.
갔더니 클래스 분위기가 너무 널널한 거예요. 거기는 우리나라처럼 커리큘럼이 쫙 짜인 게 아닌 거예요. 도제식이에요. 작업을 해서 교수님께 보여드리면 고쳐주시는 느낌이에요. 더군다나 폴드리센은 NFBC에 있는 사람이니까 한 학기에 한 두세 번 와요. 오면 한 일주일 쭉 있다 가는 거죠.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그 기간에 배울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요.
짧은 기간 안에 학생들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면 생각을 끊는 게 아니라 계속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하고 뭘 해야 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서 또 그 작품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작품을 어떻게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 디벨로핑 과정에서 너무나 좋은 카운슬러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학생들이 폴드리센을 너무 좋아하는 거지. 폴드리센이 엄청 미남인 데다가 성격도 너무 좋고 애들한테 너무 잘했어요.
누군가 학교에 여러 차레 일종의 민원을 제기했대요. 폴드리센이 원래 풀타임 프로페서였는데 그거를 반으로 나눴어요. 그래서 저 들어오기 1년 전인가 한 학기 전인가 다른 교수님이 오셨어요. 스튜디오필름빌더(Studio Filmbilder)의 토마스 마이어 헤어만(Thomas Meyer-Hermann)인데 그 사람은 프로듀서인 거예요. 한 프로페서는 프로듀서, 한 프로페서는 감독 이런 식으로 수업을 했었죠.
역시나 “넌 뭐 할래” 하는 거예요. “너는 뭘 해야지 뭘 할 수 있어”가 아니에요. “넌 뭘 그릴 수 있어?” “작화로 할 수 있어?” 이런 걸 슬쩍슬쩍 물어보면서요. 1학년 1학기 [애니메이팅 1] 이런 게 없어요. 애니메이션은 애들끼리 귀동냥하면서 해도 되고 정 뭐 하면 중간중간에 한 번씩 워크숍이 열리거든요. 그때 참여해도 돼요. 채색하는 방법, 편집하는 방법도 다 워크숍들이 있어요.
프로페서는 작품을 잘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는 역할만 하면 되는 거예요. 기술적인 것들은 기술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면 되는 게 마음에 들었죠. 연출에 대해서 어떤 공부를 해야 되는 건 사실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떤 작품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틀에 맞춰요. “너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을지 한번 해보자”는 교육 방법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폴 드리센이 있으니까 가끔 유명한 감독님들이 오셨어요. 질 알카베츠(Gil Alkabetz)나 필 몰로이(Phil Mulloy), 마이클 두독드비트(Michaël Dudok de Wit)도 왔다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폴 드리센에 대한 만족도가 컸는데 폴 드리센 임기가 끝나고 온 사람이 안드레아스 휘카데(Andreas Hykade)였어요. 안드레아스 휘카데는 독일 사람이고 아까 얘기했던 토마스하고 작업을 같이 많이 했는데, ‘우리 폴 드리센 자르고 누굴 데려왔지 어디 두고 보자’ 했는데, 너무 괜찮은 거예요. 생긴 건 마초인데, 마음이 너무 좋고 애들 작업에 대한 열정이 보통이 아닌 거예요. 애들이 자기 방에서 작업하고 있으면 밤 12시 1시에도 들어와서 얘기하는 스타일의 남자예요. 그런 사람들한테 배워서 <숨바꼭질>을 첫 번째로 했어요.
숨바꼭질 (2006)
2002년도에 들어갔으니 졸업 작품인가요?
졸업 작품은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예요. 그건 짧게 작업을 했고 <숨바꼭질>은 길게 작업을 했어요. 다른 것들도 했었거든요. 제가 카셀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그 지역에 살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서 통학을 했었거든요. 2시간 반 걸리니까 학교를 저도 자주 못 왔어요. 작업이 빨리 진행이 안 되다가 마지막에 파박했죠. 그때 독일 내에서는 제작 지원이 잘 되어 있어요. 유럽은 지역마다 문화 기관들이 있잖아요. 지원을 받아서 완성된 <숨바꼭질>이 성과가 좋아서 <나의 날고 오래된 머리>를 지원을 받고 2008년에 졸업작품으로 완성한 거죠.
2008년이 학부 겸 석사 졸업인 거예요?
그렇죠. 보통 예술대 같은 경우는 들어가면 학사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석사로 끝내요.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는 <숨바꼭질>이 거의 끝날 때쯤에 생각을 한 거죠. 그것도 개념이 다른 거예요. 저희는 학생들이 만들었으니 학생 작품이야 하지만 거기서는 너는 학생 감독이야 이렇게 나누지 않거든요.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페스티벌 보내. 배급을 해” 이러는 거예요. 애들 보니까 스스로 배급을 돌리더라고요. 당연히 그때는 스스로 찾아서 하죠. 서로 리스트 공유하기도 하고. 초반에 잘 안 되다가 나중에는 여기저기 많이 불리게 된 거예요.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숨바꼭질>을 배급하고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지원 금액을 괜찮게 받아서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숨바꼭질>으로 그 당시에 영화제도 참가하셨어요?
그때는 못 가고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를 만들고 있었어요.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2008)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를 만들고 난 다음에는 가보셨어요?
그거 만들고는 바로 한국으로 왔죠. 2월인가 돌아왔어요. 여름에 안시 경쟁 부문 됐을 때만 갔고 다른 데는 못 갔던 것 같아요.
제가 2000년 자그레브 하고 2001년 안시를 가봤거든요. 그때는 우편으로 예선심사 VHS 테이프 보내고 팩스 보낼 때란 말이에요.
DVD 구워서 했었어요.
상영은 베타테이프으로 하셨어요?
호원: 키네코(kinesco)라는 작업도 있다. (웃음)
키네코 비슷한데 디지털을 35mm 필름으로 한 장씩 찍어주는 게 있었어요.
호원: 디지털을 필름으로 변환하는 게 키네코고 필름을 디지털로 바꾸는 게 텔레시네(telecine).
웬만한 큰 페스티벌은 당시에 35mm 받았으니까 35mm로 바꿔놨었고 처음 출품하는 DVD로 보내고 아니면 간혹 미니 DV로 받는 경우도 있었어요.
작품의 테마는 어떻게 정했어요?
저도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숨바꼭질도> 결국에는 뭔가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슬픈 얘기예요. 맨 마지막에 그림자는 우리만 아는 거고 주인공은 그게 다시 돌아온 걸 모르잖아요.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도 사실은 상실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그때부터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존재가 사라진 것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한 거죠. ‘사라졌는데, 정말 사라졌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한 거예요.
2004년인가 친한 선배 중에 돌아가신 분이 있었어요. 그 앞에 제가 중이염 같은 게 생겨서 귀에서 진물이 나서 병원 다녔어요. 카셀에 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아이디어가 안 떠올랐어요. 한참을 끄적끄적 다른 것들만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진물이 빠져나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나의 작업이 빠져 나가서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죠.
창작열 같은 게 빠져나갔나.
나의 창작의 힘이 사라졌나.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것과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절충이 된 거예요. ‘이제 없어졌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돌아와 있을지도 몰라’ 그 얘기예요.
작업을 오래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2004년 정도부터 한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를 했죠. 꼬마 때 생각을 안 한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생각을 하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지?’ 그러다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이 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일반 사람이라고 하는 거랑 다른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있잖아요. 그거를 일반인과 구별을 했을 뿐이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 생각이 그런 사람으로 연결이 된 거죠.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만으로 뭘 할 수는 없으니까 그게 다 머리로 남는다. 남들이 다 볼 수 있어. 그리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서 머리가 점점점 커져 이런 상상에서 온 거죠.
호원: 97년에 만든 <머리 모양>이랑 살짝 연결되기도 해요.
결국에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엄마가 들어와서 한 번에 빗질을 해서 핀 딱 꽂으면 애는 슬퍼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그 남자의 머리는 정상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고양이는 싫어하잖아요. “너 내 주인이 아니야” 적대시하죠. 그런 내용을 담았던 거죠.
디지털을 하다가 21세기부터 종이로 돌아왔다고 했잖아요. 이 두 작품은 다 수작업으로 한 거예요?
<숨바꼭질> 같은 경우는 제대로 된 손 작화를 100%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채색은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수채화 느낌을 원했는데, 종이가 자꾸 울어서 채색은 컴퓨터에서 했어요. 그때 유럽에는 애니메이션만을 위해서 스캔, 클린업, 채색, 편집 기능까지 들어 있는 아니모(Animo)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라인 클린업까지 붓펜으로 작업을 하고 그걸 스캔해서 채색만 거기서 작업했어요.
그다음에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같은 경우는 어떤 느낌을 붓으로 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했는데, 제가 그런 자유로운 유형의 아트워크를 선망하면서도 못하기 때문에.
원래 붓으로 하는 게 조절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조절을 해버린 거예요. 조절을 하지 말아야 되는데. 저는 이렇게 되는 거를 원하면서도 결국에는 성격 때문에 똑같이 그리고 앉았으니까. (웃음) <뉴-월드 관광>처럼 항상 바라는 것과 아트워크를 현명하게 못하고 있습니다.
호원: 카셀 다니실 때 그 전공에서 추구하는 작업 방식이나 스타일이 있었어요?
그런 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희 때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막 할 때였어요. 3D 애니메이션 하고 싶은 애들이 와서 우리 들어가기 조금 전부터 3D 애니메이션을 할 때였고 저희 세대보다 훨씬 더 앞에는 토마스 슈텔마크(Thomas Stellmach)의 <퀘스트 Quest> (1996, Tyron Montgomery)랑 <밸런스 Balance> (1989, Wolfgang Lauenstein, Christoph Lauenstein) 스톱모션 두 작품이 오스카를 받았어요.
스톱모션을 지도하는 유명한 선생이 있었어요?
없어요. 없는데 가능하다는 거예요. 애들이 하면 할 수 있게끔 조달을 해주는 거죠. 카셀은 재밌는 학교였어요. 지금은 아까 얘기했던 안드레아스 휘카데도 토마스 마이어 헤어만도 그만뒀고 새로운 인자들로 바뀌었지만.
2010s 서울
2008년에 돌아오시고 나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우선은 돈을 벌어야 된다는 현실감을 깨달아서 강의를 나갔죠. 처음에 계원 쭉 나가다가 여기 다른 데로 연결돼서 다른 데로 나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나가서 한 1년 반인가 2년인가 하고 그러고선 작업을 슬슬 시작해야 됐는데, 2009년 말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그때 강의하느라고 작업은 거의 못 잡고 있었고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 여기저기 굵직굵직한 페스티벌을 나가는 상황이어서 자만에 많이 빠져 있었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가족 문제나 이런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다가 엄마를 생각하는 작업을 했던 게 <너의 근원>이에요.
너의 근원 (2010)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서 제일 단순하게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작업을 했어요.
간결함에 대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런 콘셉트가 떠올랐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려니까 씨앗이 생각났고 거기다 컬러를 넣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단순하게 선 느낌으로 가자 했고 유일하게 사운드 이펙트를 제가 남편이랑 둘이서 입으로 만들었어요. 부채 부치고 집에서 폴리 따고.
호원: 이 작품에서 거의 마지막 신 전까지는 가장 폴 드리센 다운 작품처럼 보였어요.
그런 유사성을 느낄 수 있어요.
호원: 사운도 그렇고 착착 감기는 거야. 과감하게 시선을 바꿔가면서 공간감도 내다가 갑자기 얘기가 딱 멈추고 확 전환이 되는 거예요. 뭔가 계기가 있겠구나.
엄마를 한번 더 살게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엄마가 박수를 치면서 입모양만 “잘했어” 이러는 거예요. 칭찬해 주는 말을 하는 건데, 이게 누군가를 그리면서 만들었겠구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넣었어요.
그 작품을 만들고서 작은 카페 같은 데서 제안이 들어와서 한번 전시를 했었어요. 봄에 거기서 상영을 하면서 또 다른 사람이 좋다고 그래서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또 다른 미디어 아트 하는 분 들하고 전시를 같이 했어요. 그때는 채널을 나눴었어요. 엄마 장면 하나하고 원거리에서 잡은 거, 근거리 잡은 거 이렇게 세 개로 나눠서 망사 거즈천을 겹치는 식으로 공간감을 주고. 그리고 또 어디 다른 곳에서 한 번 해서 세 번 정도 전시 공간에서 같은 작품을 상영했어요.
채널마다 상영되는 영상 자체를 다르게
그렇죠. 분할해서 이 채널에서는 이것만 보여주고 이 채널에서는 저것만 보여주고 이렇게 돌아가게끔 했었죠.
호원: 앞에 미니멀한 것만 딱 보여줬으면
씨앗의 일기? 씨앗의 모험?
호원: 그러니까 알레고리로만 알겠는데, 엄마가 나오니까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는 거예요.
다시 읽기 위해서는 전시가 나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전시장에서 보여줄 그림체는 아니기도 하고 귀엽잖아요?
귀여운 거 전시장에서 하면 안 되나요? (웃음)
호원: 귀여운 걸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킨 다음에 묵직한 걸 탁 던지지.
그리고 2년 뒤에 나온 게 <괜찮아? 미쉘,>입니다.
2006년에 <숨바꼭질>이 완성되고 나서 안시에 갔었어요. 작품 상영은 아니었고 학교 애들이 항상 안시 하면 수학여행처럼 갔었어요.
사실 그게 안시 호수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거기서 항상 파티가 있잖아요. 그날 그 이야기랑 똑같이 친구들하고 파티에 간 거예요. 텐트 안에서 춤추는 애들이 있고 텐트에서 맥주를 받아다가 물가에 앉아서 다 같이 마시고 있는데, 진짜 저쪽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어. 우리가 다 속으로 생각은 했지. ‘술 취했는데, 좀 위험하지 않아?’ 노는데 갑자기 사고 났다는 거야. 물에 빠진 거예요. 우다다다 하면서 헤드라이트 오더니 막 부르는 거야. 여자라는 거야. 애들은 완전히 술이 깨서 보고 있다가 돌아왔어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 자전거 타는 남자를 만난 거예요. 거의 새벽이고 깜깜한데 그 남자가 진짜 그렇게 처연한 목소리로 미쉘을 외치는 거예요. 그 호수가 엄청 크잖아요. 수영을 해서 왔으면 이 물가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자전거를 타고 외치면서 가요. 밤공기를 확 찢으면서. 그 순간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어요. 내 판타지인 거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죽음 앞에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 죽음을 방관한 거잖아요. 그 애의 미쉘 소리랑 우리 가슴속에 어떤 애절함이 느껴지면서 죽음이 만들어낸 각자의 이별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리고 친구가 하나 나오잖아요. 다들 자기 몸에 남아있는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나를 떠나간 존재와의 연결된 고리들이 떠오르면서 그 영혼을 만나고 눈물도 흘리고 기뻐하기도 했는데, 그 애만 혼자 가는 거예요. 친한 친구인데 제가 독일에서 입학하고 한 1년 정도 뒤인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젊으신데 암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외동딸이라 상처가 굉장히 컸어요. 정신적인 공황도 오고 되게 힘들었던 친구인데, 이상하게 그 친구만 직진을 하는 거야. 그래서 “괜찮아?” 물었어요. 눈시울이 붉어져서 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걔 상처는 닫히지 않는 거죠. 열려 있는 상태인 거죠. 걔는 미쉘은 아니죠. 미쉘이라는 건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상처, 이런 느낌이죠. 괜찮아? 우리의 이별?
호원: 그러니까 물음표를 찍은 다음에 미셸하고 점점점도 아니고 쉼표를 찍고 끝내버리지.
인쇄에서 항상 틀리게 나와. (웃음) 그런 내용인데,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다 보니까 첫 장면부터 서사를 시작했던 분들은 갑자기 사라지니까 첫 장면이 왜 있으며.
호원: 그것도 한국말로 “여보세요”를 해버린 거야. 내 얘기를 하겠다는 거지. 물에 빠져 죽은 것 때문에 돌아오는데, 전화 장면이 또 나오는 거예요. 너의 혼란을 정리 안 해주겠다는 식이어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했죠.
돌아와서도 계속 수작업을 하셨어요.
<40>도 수작업이고 <어릿광대 매우매우 씨>만 디지털 컷아웃이에요.
호원: 학부생들이랑 같이 하면서 학생들이
인간문화재 될 거라고
호원: 이 작품의 정서가 수작업을 요구를 하기 때문에
요즘 분들은 색감이며 텍스처며 디지털을 굉장히 세련되게 잘 쓰세요. 그런 걸 제가 못 해내니까 그런 거예요.
<미튼>하고 <어리광대 매우매우 씨> 같은 해로 나온 걸로 되어 있어요. 작업도 같은 해에 하셨나요?
<매우매우 씨>를 먼저 했을 텐데, 완성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묵혀 놓는 사이에 <미튼>을 한 거죠. 청탁이 들어와서 했다가 타이틀, 엔딩 크레디트 빼고 제 작업으로 만든 겁니다. 그거는 오랜만에 채색까지 100% 수작업.
커머셜을 해보고 싶은데 저한테 커머셜이 너무 안 오는 거예요. 호감을 갖고 있던 기억발전소라는 아카이빙 하는 그룹이 있었어요. 거기서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홍보 영상 만들었으면 좋겠다 해서 정말 작은 예산받고서 했어요. 하는 김에 열심히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채색하고 진짜 카메라 촬영하고.
호원: 거의 30년 커리어에서 꾸준히 했어요. 근데 보면은 더 나와야 하는데, 안 한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도대체 뭘 하셨을까 했어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좀 게으른 거죠. 제가 강의를 2017년까지 했어요. 2010년 정도부터 2016년까지 정말 강의량이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괜찮아? 미쉘,>도 더 못 뽑아낸 게 아쉬워요. 스태프를 썼는데 제가 컨트롤을 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연출도 깊이 있게 못 해내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계속 됐죠. <매우매우 씨>도 사실은 너무 힘들게 만들었지만, 저는 되게 좋아해요. 제가 지금까지 안 했던 제 나름의 유머 코드들이 들어가 있고 노래도 따라 하면 재밌거든요.
애초에 어떻게 관심을 가진 거예요?
원래 무대 공연이 있었어요. 숙명가야금연주단 예술감독 하신 송혜진 교수님이라고 국악 쪽에 굉장히 공이 크신 분이 신데, 그분이 음악극을 만들고 저한테 무대 영상에 쓰일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 하셔서 했는데, 재밌는 거예요. 그때 엄유정이라고 지금 회화 작가 중에 유명하신 분이 저희 후배이기도 하고 남편과 사제지간이기도 해서 같이 캐릭터 만들고 했어요.
내용 자체는 고리타분하죠. 근데 거기서 나오는 용어들, 몰랐던 것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요즘 어린이 애니메이션은 판타지에 싸우자 이기자 이거밖에 없으니까 국악에서 어린이들이 보면 재밌을 만한 것들 요소들에 대해서 하면 아기자기하게 재밌겠다 생각하고 그림책도 그렸기 때문에 단편을 먼저 만들어서 가능성을 보자 한 거죠.
호원: 처음부터 20분짜리였어요?
처음엔 좀 더 짧았죠. 근데 대사가 길고, 이게 노래극이잖아요. 노래를 제가 직접 부르면서 하는 게 아니다 보니까 점점 길어져서 굉장히 애매한 타임이 나왔죠.
처음부터 노래의 러닝 타임으로 작업하지는 않았던 거예요?
가사는 어느 정도 있는 상태니까 가사가 반복될 정도의 느낌을 감안을 하긴 했는데, 원래 담고 있는 이야기가 있고 노래도 들어가고. 대사 자체가 저는 되게 재미있었거든요. 우리 어렸을 때 그냥 왜 할아버지나 이렇게 보면 이렇게 아버지나 신문을 읽으실 때 약간 사설하듯이 읽는 게 있어요. 그런 식으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이희문 씨가 그거를 잘했었고 그런 것들을 살린 아동용 만화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무대 영상이면 <매우매우 씨>와 같은 이미지로 무대 공연을 했나요?
<매우매우 씨>는 완전히 컬러가 들어가고 텍스처도 들어가는데, 당시에는 그림책처럼 그림자 극처럼 했었어요. 검은색으로 실루엣을 그림자처럼 컬러가 들어가지만 빛이 투과된 느낌으로.
공연도 가서 보셨나요?
저는 다른 것 때문에 못 봤었고 남편이 무대 영상 감독이어서 찍어온 걸 계속 봤어요. 꽤 오랫동안 여러 차례 극이 만들어져서 3~4개 버전으로 공연을 했었어요. 그러고서 송혜진 원작자님한테 부탁을 드렸더니 애니메이션 만들어 보라고 허가받아서 만든 거죠.
작품의 캐스팅이 지금 보면 대단해요.
이희문 씨하고 신승태 씨 두 분이 원래 같이 많은 걸 하셨었고 씽씽이라고 그룹 해서 유명해지더라고요. 두 분 하고 여자 한 분하고 타이니 데스크 나가서 엄청 유명해졌잖아요.
<매우매우 씨>는 반응이 없어서 시리즈화를 접어버린 건가요?
은근 상도 받고 아이들을 위하거나 배리어프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상영이 꽤 됐는데, 원래는 25분이니까 프로그램하기 힘든 분수잖아요. 성인물이면 오히려 괜찮은데, 아동물이니까 일반 페스티벌에서는 하기가 좀 힘들죠. 제작 중 스탭과의 문제도 있었고.
호원: 이게 2016년이니까는 몇 년만 뒤쪽으로 왔으면 웹애니처럼 짧게 에피소드식으로 탁탁
저는 그런 것도 가능하다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주 초단편으로 해서. 그때도 유튜브 얘기는 있었으니까. 제가 집어치운 거죠.
호원: 재담꾼으로서 좌충우돌하는 캐릭터가 웹애니처럼 짧은 호흡으로 탁탁탁 치고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보여주면 어린애들은 그거를 다 따라 하거든요. 일단 그건 어린이 아동용으로는 좋은 거잖아요. 이희문 씨의 말투나 신승태 씨의 말투나 노래 나오는 거랑 다 따라 하면서 돌아다니고, 아쉽게 됐죠. 혹시 알아요? 나중에 또 할지.
진짜 모르는 거죠. 대상 감독으로서 활동을 펼치면서 과거 작품 발굴되면
언제까지 그 타이틀이 있는 거예요?
한 번 대상 감독은 영원히 대상 감독이죠.
<40>은 2020년에 나왔어요. 4년을 건너뛰었어요.
<40도> 완성을 하고 추가 작업을 조금 했던 것 같긴 하고, 제가 2018년에 강의를 그만두고 그 해 제작 지원을 받았어요. 이제 좀 작업을 하라는 얘기구나라고 해서 그렇게 2년 후에 한 거죠.
3D가 들어간 거 같아요.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3D를 조금 넣었죠. 잘은 못하지만 속도감이나 공간감 때문에 마야로 라인만 따서 프레임 뽑아서 넣었죠.
토끼가 나오고 이상한 공간에 들어가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어요.
앨리스가 시간을 쫓는 그것도 있고 토끼가 굉장히 빨리 확 커요. 저는 토끼에 대한 두려움도 살짝 있어요. 토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외모적으로 토끼가 약간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을 해요. 토끼가 막상 귀여운 것 같아도 마치 설치류와 비슷하기도 하고 그런 무서움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아무리 쫓아가도 아빠를 쫓아갈 수 없는 상황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맞다 보니까 토끼를 쓴 거죠.
토끼도 동양에서 보는 토끼(rabbit)가 아니고 서양에서 보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토끼(hare)가 있잖아요. 더 그로테스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거를 고르신 거예요?
맞아요.
40쯤 되면 나이 들어감에 대해서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걸까요?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나이가 드신다는 게 제일 컸죠. 제가 나이 드는 것보다는 부모님의 나이 듦에 대한 얘기가 퍼센티지가 많아요. 아버지가 나이 드셨는데, 어느 순간 ‘이게 우리 아버지의 늙었을 때 모습이구나’, ‘이게 우리 아빠의 늙음의 정체구나’를 깨닫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엄마 아빠가 차근차근 늙어가시는 모습을 보지만 ‘우리 엄마 진짜 늙었네’, ‘이제 할머니네’라고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늦게 오더라고요. 남들은 다 할머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는 우리 엄마 할머니 같지 않잖아. 나는 우리 아빠 할아버지 같지 않아.’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노인이구나 하는 때가 와요. 그거에 대한 얘기인 거죠.
보면 계속 숫자가 나오잖아요. 처음에 0부터 40하고 40에서 60 되는 순간에 아버지가 중년의 옷을 입고 저는 어린 토끼가 돼서 뒤에서 보고 있어요. 근데 아빠도 다시 토끼로 변해서 이상한 천막 같은 데로 들어가잖아요. 제가 막 쫓아갔다 나왔을 때는 아빠가 다시 그 옷을 입고 살이 찐 노인으로 변하잖아요. 저한테는 너무 짧은 거예요. 분명히 노인이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 제가 보고 느꼈던 현상들을 담은 거죠.
처음에 띵똥 하면서 택배 박스가 오고 아빠가 거기 든 이상한 옷을 입으니까 노인으로 변했잖아요. 그리고 걸어가서 텔레비전 보다가 눕고 자다가 타이핑 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마지막에 커버린 저한테도 “이건 네 박스야 하고” 올 텐데, 나는 늙으면 어떨까라는 막연한 두려움까지 담았어요.
<40>의 작업은 컴퓨터로 바로 하신 거예요?
<40>도 라인까지는 색연필로 텍스처를 사용하고 채색은 컴퓨터에서 했어요.
호원: 왜 아버지 혼자 식사를 하게 했는지
아버지 혼자 드시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닐 테고 커튼을 치는 거예요. 약간 떨어져 있는 거죠. 그러면서 아빠를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니까. 아버지가 거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거죠.
호원: 같은 말을 반복할 때는 확실히 찡하긴 했었어요. 그러면서 맞은편에도 밥그릇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냥 혼자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로 가야 되나.
이렇게 감정이입을 해주잖아. (웃음)
공간이 텅 빈 느낌이었어요. 배경도 생략된 부분들이 많아요. 작품 정서에 따른 아트웍인가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많이 들어내는 편인 것 같아요. 그 집의 디테일한 배경이 나올 필요도 없는 거고.
희미한 기억 가운데 일부 이미지만 포커스 맞는 느낌도 있고요.
조금 그렇긴 하지만, 그건 진짜 성향인 것 같습니다.
호원: 감독님이 엔딩으로 잡은 거를 내가 그동안 못 따라갔던 게 많아요. 분명히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는 있지만 관객한테는 대놓고 안 해줘. 이 사람은 왜 얘기를 안 하지?
부끄러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호원: 감독님을 초기 때 알았던 한편으로는 되게 조용하고 한편으로 되게 시니컬한 막내 꼰대 같은 이미지가 계속 있는 거예요.
보통 애늙은이라고 그러죠.
호원: 그 양면성이 작품에서도 계속 가요.
관객들한테 다가가지 못하는, 다 얘기 안 하는 느낌, 얘기하다 만 것 같은 느낌, 뭔가 깊이 못 들어오게 막는 느낌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모든 감독이 자기만의 어떤 선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때나 남의 얘기를 갖다 쓴다 하더라도 자기 시각 안에서 푸는 얘기니까 ‘나는 여기까지 얘기를 해줘야지 그렇구나 해주는 관객보다 내가 이 정도까지 얘기를 해줬을 때 이 허들을 넘고 들어오는 관객들이 좋아’인 거죠. 약간 밀당이죠.
호원: 나는 초대받지 못한 관객인거지.
아니 아니 아니야 (웃음)
호원: 이전 작품들하고 다르게 1차 관문을 열어준 게 감독님 목소리가 등장한 작품들부터라고 느꼈어요.
보통은 다이얼로그가 완전히 없던 작품들이었죠.
호원: 두 번째 허들에서 문을 열어준 건 <40>부터 시작해서 <뉴-월드 관광>, 그다음에 <50>의 기획안까지, 내가 비로소 동년배로 따라갔을 때 이건 내 얘기이기도 하구나.
제가 연출에서의 미숙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보이는데 남들은 왜 못 봐라고 생각한 부분도 당연히 있었죠. 근데 지금 생각해서 보면 과거 작품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안 보여줘 놓고선 왜 못 봐라고 했던 경우들도 많았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래도 그거를 보고 해석을 해 주시거나 공감을 해주시는 분들은 있더라고요. 아주 정말 손에 꼽죠. 구체보다 추상이 훨씬 많은 걸 담고 있잖아요. 구체보다 추상일 때 담론이 훨씬 더 커지게 되잖아요. 작품의 이해도 제가 길을 만들어드리는 것보다는 이 정도까지 온 다음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로 이해를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40>은 아버지와의 나이 차이 40의 의미도 있잖아요. <50>은 내가 50대가 돼서 보는 시각 외에 포인트가 되는 이야기가 있나요?
‘여자가 50이 됐어’라는 이야기죠. 신체적인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완경도 있고 호르몬의 변화 같은 게 생기게 되고 노안도 있고 저처럼 흰머리가 많이 생기기도 하고 피부도 달라지고 관절이 아프고 기억력 감퇴 어쩌고 저쩌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달라지는데, 텔레비전에서나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체험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이야기예요. 제가 체험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한번 만들까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저는 <40>을 만들고 나서 50대에도 그 나이대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진짜 50이 됐으니 이제 나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겠구나. 만약 이 얘기가 된다면 60의 이야기도 만들 수 있겠구나. 그게 꼭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돼요. 저희 남편이 주인공일 수도 있는 거고 누군가의 육십을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우리나라 단편 애니메이션 역사가 누구 기준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여 년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때 만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때 관람객들도 같이 나이가 들어가니까. 일본에서 만화를 좋아했던 세대들이 할아버지가 돼도 똑같이 만화책을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집단은 굉장히 적지만 그거를 봐줄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이제 더 이상 20대 30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으니 이쪽으로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죠.
인터뷰 2024년 11월6일 @ 은평구 신사동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