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FOCUS_LEE Moonjoo
이문주의 작품 세계
소실점의 맞은편에 당신이 서있다
Prologue
“음... ‘상실’이랄까요? 그런 것을 계속 다뤘던 것 같아요.”
30년에 가까운 세월, 어림잡아 12편의 작품. 다작일까, 과작일까? 더 중요한 것은 꾸준함일 테다. 작품들을 하나씩 보면서 일관성을 찾으려 하고, 동시에 단절, 발전, 도약을 찾으려 한다. 나름 ‘감독론’을 준비하면서 이문주에게 대놓고 물었다. 감독은 ‘상실’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상실은 명사일까? 그렇다면 ‘잃어버린 대상’ 일 수 있다. 상실은 동사일까? 그러면 시제와 만나 ‘잃어버렸다/잃어버리고 있다’로 풀어나갈 수 있다. ‘잃어버린 상태’, 즉 상실감이라는 정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주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상실’을 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문주의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질문의 출발로 삼아 보면 어떨까?
시선으로부터 향하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처음 도전할 때, 애니메이션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펼쳐진다. 가능성은 자유로움이기도 하지만, 막막함이기도 하다. 호기심과 두려움, 이 둘을 극복해야 비로소 첫 프레임을 만들고, 그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두 번째 호기심과 두려움을 마주한다. 그렇게 한 프레임 씩, 반복되는 자유로움과 막막함, 호기심과 두려움, 고민과 선택이 쌓여서 애니메이션이 완성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첫 작품은 의욕이 넘치는 만큼 서툴고, 야심 차면서도 어색하고, 지나치게 무겁거나 너무 가볍고, 늘어지거나 조급하다. 풋풋한 열정, 설익은 포부, 수줍은 이상, 조심스러운 도발, 상냥한 야유, 거친 다정함... 이러한 것이 첫 작품의 매력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멈추고, 누군가는 이로부터 나아간다.
이문주의 첫 작품 <틈>은 1995년에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에서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비로소 여기저기서 시도되고, 모색되고, 탐색되던 시기였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낯설었고, ‘독립’이라는 말도 수상했다. 여기에 ‘디지털’, ‘컴퓨터 그래픽’, ‘2D’라는 용어는 일상의 경험보다 앞서 나갔다. 그 무렵 만들어진 작품들 사이에서 <틈>은 꽤나 부드럽고 친절하다. 캐릭터 디자인과 색감 등 비주얼 면에서 부드러우며, 스토리텔링에서는 친절하다. 이러한 특징은 다시 말해 의도치 않게 ‘튀는’ 작품이라는 얘기이고, 또 다른 말로는 꽤나 ‘벗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당시의 독립 애니메이션들과는 ‘결’이 다르다. 그렇다고 엄청난 것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대단하다는 얘기도 아니다. 도리어 소박하고, 심지어 단순하기까지 하다.
요란한 자명종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 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이내 바쁜 걸음으로 내달리는 삶. 그것을 멈추는 것은 횡단보도 건너편의 신호등. 그때 비로소 잠시 올려다보는 하늘.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풀어 던지자 삶은 다른 속도, 다른 풍경으로 넘어간다. 낚시를 하고, 잡은 물고기를 옷으로 바꾸고, 그림을 그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부는 그곳은 현실 너머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신호등의 초록불과 함께 되돌아온 현실. 그를 둘러싼 것은 빌딩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다정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지나간다.
3분을 넘지 않는 이 짧은 스케치는 그저 습작에 머물 수도 있다. 더 이상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았다면 잊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작업을 이어간 이문주의 활동을 따르다 보면, <틈>은 흥미로운 요소들을 이미 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제목으로 정한 ‘틈’에 관심이 간다. 틈은 균열이다. 단단한 것을 허무는 시작점이다. 막혀 있던 것을 뚫는 지점이기도 하다. 틈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또한 틈은 흐름과 멈춤이 교차하는 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빛, 움직임과 멈춤, 저 너머의 모습은 틈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빛, 움직임과 멈춤, 저 너머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그 자체의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틈>은 시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후로 이문주의 작품에서 시선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룬다. <틈>에서 시선은 이곳에서 틈을 통해 저 너머로 향한다. 시선이 향하는 대상은 아직은 멀리 있다. 이상향이라는 말을 쓰지만, 어쩌면 신기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틈>은 단지 균열과 일탈, 해방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이를 건너다보는 ‘시선’의 위치를 설정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문주의 작품에서 시선은 아주, 몹시, 대단히, 중요하다.
2000년 작 <낯설음>은 <틈>의 다크 버전과도 같다. 무리들 속의 사내는 불안정하다. 그의 시선은 도무지 안착할 대상을 찾지 못한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겁다. 시선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방황한다. 그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 것은 일상의 틈이 아니라, 꿈을 통해서다. 그곳에서 그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누군가가 가리키는 곳, 도시로 향하지만 어디에서도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없다. 그럴수록 주변은 불신과 불안, 불온한 시선으로 채워질 뿐이다. 시선을 피할수록 시선이 달라붙는 듯하다. 저 검둥개가 특히 거슬린다. 그래서 처치한다. 비로소 벗어난 걸까? 이런! 커다란 달마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겨우 돌아온 원래의 자리,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불안하다. 모든 시선이 온통 그를 향한다.
<낯설음>에는 틈마저 봉쇄되었다. 시선은 차단되거나 포위된다. 이상향은 없다. 구원도, 일탈도 없다. 카프카의 <성>처럼 입구가 없고, 입구가 없기에 출구도 없다. 갈수록 더욱 악화될 뿐이다. <낯설음>은 흡사 나락의 블랙홀과도 같다. 시선은 불안정하고, 대상으로부터 겉돌며, 오히려 모두의 시선이 나를 외면하면서 나를 지우거나, 반대로 모두의 시선이 나를 응시하면서 나를 구속하려 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과감한 시선의 일탈은 검둥개를 처치하는 가장 폭력적인 장면에서 허용된다. 위아래가 뒤집힌, 전도된 시선을 설정함으로써 <낯설음>은 폭력을 아주 낯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틈>에서부터 <낯설음>까지 이문주는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자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런 점에서 공동연출의 <합창> 또한 불협화음을 내는 합창단원을 색출하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선은 이상향과 목표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너무 멀리 있거나 신기루에 불과하다. 시선의 대상은 단단하지 않은, 언제든 사라질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시선의 주체 또한 숨 막힌 현실과 불안 속에서 소모되면서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의심받고 허물어지는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
이문주가 유학을 결심했을 때, 목적지는 독일이었다. 폴 드리센을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 폴 드리센이 누군가?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온, 당대 가장 유명한 감독 아니던가? 그저 명성 때문에 그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폴 드리센의 애니메이션은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라는 제작 기법을 통해 2차원 평면성을 의심하고 전복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해내는 일련의 실험들로 가득하다. 그는 누구나 사랑에 빠질만한 매력적인 그래픽 스타일을 내세운다. 그의 이야기는 중세의 마법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넘나 든다. 무엇보다 선 하나로 공간과 차원을 재구획하고, 소실점을 의도적으로 없애거나 새롭게 설정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무척 매력적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몹시 위험하다. 그를 추앙하는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카피캣에 그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문주가 예정과는 달리 폴 드리센과 1년 남짓한 시간만을 함께 한 건 그리 불행만은 아니었을 테다. 폴 드리센뿐만 아니라 안드레아스 휘카데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제작한 작품들을 보면, 이미 이문주는 폴 드리센 작품의 미덕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소화해 냈다고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작 <숨바꼭질>은 마술사에서 출발하여 마법사로 끝나는 작품이다. 마술은 트릭이고 마법은 주술 또는 초월적 능력의 영역이다. 마술사는 청개구리를 통해 자신의 마술을 선보이지만, 정작 마술사의 능력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미지의 생명체는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 활약하기보다는 다른 생명체에 기생하면서, 숙주를 조종하여 능력을 발휘한다. <숨바꼭질>은 그런 능력-생명체가 숙주로부터 이탈하여 우여곡절을 겪다가 다시 복귀하는 이야기를 따른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술사였지만 결국 마법사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아닐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마술사-마법사로부터 벗어나 그의 그림자로 집중하게 된다. 미지의 생명체가 침실을 벗어날 때 보았듯이, 그림자는 다양한 형태로 바뀐다. 그래서 숨바꼭질은 ‘숨었다/찾았다’의 문제이거나 ‘있다/없다’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숨바꼭질>은 겉으로 드러난 것 속에 무엇이 숨어서 지배하는지, 그 숨어 있는 것이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모양을 바꾸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마술사는 마법사가 될 테이지만, 마법사는 결코 자신의 마법을 알 수 없는, 그저 조종되는 숙주에 불과하며, 스스로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또는 어떤 능력에 지배되는지도 모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정작 자신에게 마법의 능력이 돌아왔는지도 모르는 아이러니 상태에 머물 수도 있다.
2008년 작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는 <숨바꼭질>의 주제를 이어받되, 조금 더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발전시켰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밖으로 형상화된다. 우리가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반응을 한다. 대부분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만 주인공의 머리는 멈추지 않고 쌓이고 자라난다. 그렇게 낡고 오래된 것들은 생각, 상념, 고민, 고뇌, 미련, 추억, 기억, 집착 등등으로 뒤엉켜 있을 것이다. 왜 이리되었을까? 유독 주인공만 생각의 먼지 뭉텅이를 제때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이 생각을 더 깊이, 더 오래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알 수는 없다. 다만 주인공이 특별할 뿐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이 불편하다. 그래서 낡고 오래된 머리를 강제로 잘라버리려 한다. 그러면 모두 해결되는 걸까? 아니, 여기서 진짜 문제, 진짜 고민이 생긴다. 남들과 같은 외모를 갖게 된 나는 그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려 들어갈 수 있을까? 머리를 잘라내면 ‘나’라는 정체성이 유지가 될까? <숨바꼭질>에서 ‘나’ 대신 ‘그림자’가 강조된 것처럼,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는 나에게서 잘려 나온 머리카락과 먼지가 나를 대신하여 세상을 부유하면서 끝을 맺는다.
<숨바꼭질>과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는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정석을 따른다. 연출은 한결 정돈되었다. 드로잉 라인 또한 매끈하게 정리되었다. 공간은 필요에 따라 한껏 과장되거나, 과감히 생략되기도 하였다. 움직임도 리듬감을 살리고 완급조절도 능숙하게 처리했다. 그러면서 시선의 문제를 주인공에게 붙들어 두지 않는다. 시선은 주인공의 불안과 불만을 따라가지 않는다. 두 작품에서 시선은 주인공 외부에 놓인다. 시선은 외부에서 주인공을 바라본다. 주인공은 시선의 주체가 아닌, 시선의 대상이 된다. 나아가 주인공 대신 그림자와 잘린 머리가 주인공을 대체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은 묻는다. 주체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시선과 상실
<너의 근원>과 <괜찮아? 미쉘,>은 유학을 마치고 다시 귀국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교차점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곳과 저곳의 오버랩 속에서, 무엇보다 시선과 상실에 대한 모색이 한 단계 더 진행된 결과물을 보여준다.
<너의 근원>은 <숨바꼭질>과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에서 다룬 주제, 즉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나-주체’에 대한 질문을 이어받는다. 제목 그대로 ‘나/
너’는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탐색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2차원 평면성에 대한 폴 드리센의 접근과도 꽤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폴 드리센이 <Air!> (1972)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의 근원>은 가장 미니멀한 형태들이 수평선을 경계 삼아서 상황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비어 있는 여백은 사운드가 대신 채운다). 위와 아래로 이동하는 수평선의 위치에 따라 평면은 새로운 공간으로 재편될 수 있다. 수평선은 물이 되기도 하고 땅이 되기도 하고 하늘이 되기도 한다. 수평선을 경계로 안과 밖이 나뉠 수도 있다. 그로부터 나고 자라고 떠나고 떠돌다가 되돌아오고 다시 날아가는 것이 바로 ‘나/너’의 기원이 된다. 분명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 폴 드리센으로부터 출발하여 변주를 통해 이문주 나름의 존재론을 풀어나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폴 드리센의 영향권에 안착하길 거부한다. 그대로 엔드 크레디트를 보여주며 끝내는 대신, 수평선을 다시 불러낸다. 방금 전까지 수평선은 다양한 경계선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구체적인 형태가 된다. 그 위에 엄마가 서 있다. 정면을 향해 박수를 치고, 두 손을 입에 대고 무언가 외친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5초 후 엄마는 사라진다. 엄마는 응원의 말을 남겼을 테다. 이 장면은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까? 중요치 않다. 15초의 장면 없이도 ‘너/나’의 근원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이 장면을 통해 길을 잃지 않게 된다. 이 작품은 목적지에 정확히 당도해야만 했다. 가능하면 작품의 방향성을 열어 놓는 것이 이문주의 방식이지만, <너의 근원>만큼은 자신이 설정한 지점에서 끝내야 했다. 정해진 지점에서 엄마는 저 너머에서 나를 향하고, 나는 엄마의 맞은편에서 바라본다. 양쪽의 시선은 비로소 하나의 직선 위에 놓인다. 그 직선 위에 근원으로서의 엄마가 있고, 엄마는 그 선을 따라 사라진다. 소실점에서 기원과 상실이 포개어진다.
<괜찮아? 미쉘,>은 보다 입체적이다 (이 작품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별도의 리뷰 글에 실었다). 축제와 파티가 사고로 넘어가고 그로부터 상실의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작품 속 분위기와 정서가 급변한다. 설렘과 흥겨움에서 놀람과 경악, 공포로, 그로부터 무력함과 난처함으로, 다시 다급함과 안타까움으로, 그러고는 상처와 연민, 위로로... 때문인지 이 작품의 시선을 좇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문주의 작품 중에서 가장 과감하고 역동적이다.
예상치 못한 비극을 목격한 이들에게 이 작품은 ‘목격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묻는 대신, ‘비극으로부터 소환되는 각자의 상실’을 보듬는다. 목격은 외부의 사건을 향하지만, 외부의 사건은 내부에 감추어진 상실감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괜찮아? 미쉘,>은 사건 보고서가 아닌, 심리 치유술이 된다. 그 과정에서 시선은 바깥을 객관적으로 좇다가 결국엔 내면의 주관을 관통한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이문주의 작품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틈>과 <낯설음>은 내면의 불안감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의 대상 (이상향)을 찾고자 했다. 시선은 결코 그 대상을 성공적으로 포획하지 못했다. <숨바꼭질>과 <나의 낡고 오래된 머리>는 불안정한 주체를 외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이때 시선은 주체에게 속하지 않은, 외부에 놓인 (어쩌면) 객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랬을 때, <너의 근원>과 <괜찮아? 미쉘,>의 시선은 다시 주체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마냥 순진하게 시선과 주체를 처음부터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경유하여 비로소 내부로 안착하는 접근 경로를 취한다.
이러한 시선의 재설정이 중요한 까닭은 ‘나’라는 주체를 전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된 관계 속에 놓고자 하기 때문이다. <너의 근원>에서 나는 엄마와 마주 보고서야 비로소 ‘나’로 태어난다. <괜찮아? 미쉘,>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침묵 속에서 인정하고 보듬어 줌으로써 비로소 나의 상실을 인정하고 치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내부와 외부를 두루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야 온전히 상실을 (그리고 그로부터 위로와 치유와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
상대를 바라보는 적절한 거리와 위치
2020년에 발표한 <40>은 아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빠와 나 사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40은 아빠가 나를 낳았던 나이이자, 아빠와 나의 나이 차이이며, 내가 (작품 속) 현재에 다다른 나이이다. 즉 아빠가 있던 자리에 내가 있고, 그 자리에서 아빠를 바라보는 구조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각자의 자리가 중요하며, 그곳에서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한창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부각되고, 뿌옇고도 침침해진 아빠의 시력이 도드라진다. 나의 시선은 아빠의 모습을 향하고, 아빠의 시선은 가까운 것마저 힘겹게 가늠해야 하는 상황으로 대치를 이룬다.
그렇다고 어디까지나 정적인 상태에 머물지는 않는다. 나이는 시간의 흐름이지만, 40이라는 시간, 숫자에는 속도가 결부된다. 아빠는 언제 노인이 되었던 걸까? 그건 마치 택배 상자로 배달된 노인의 옷을 걸쳐 입는 것과 같다. 그렇게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노인이 되었다. 몸이 무거워지고, 움직임이 굼뜨고,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눈이 침침해지고, 단순한 행동조차 쉽지 않은 상태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80은 상당히 느릿하고 더딘 속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도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다. 젊은 날의 속도는 빠르고 노년의 속도는 느리지만, 나는 결코 아빠를 따라잡고 추월할 수 없다. 40의 아빠와 0의 나, 80의 아빠와 40의 나, 그리고 60의 아빠와 20의 나 사이에서 그 어느 경우에도 40이라는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그건 아킬레우스가 느림보 거북이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과도 같다. 나의 입장에서 아빠는 언제나 앞서 달리는 토끼이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40의 간격은 유지된다. <40>은 이 상황을 1인칭 시점으로 따라간다. 건축 투시도처럼 강조된 깊이의 공간 속을 아빠는 먼저 내달리고, 나는 아빠의 뒷모습만을 좇을 뿐이다. 그렇게 앞서 달려간 아빠는 이대로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사라지는 대신, 아빠-토끼는 아까 그 노인의 옷을 다시 걸쳐 입는다. 나-토끼는 여전히 바라볼 뿐이다. 다만 내가 조금 더 커지면서 성장한 것이 위로일까? 아니면 아빠가 작아진 걸까?
<40>은 줄곧 아빠를 바라보는 ‘나’라는 1인칭 시점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아빠와 나 사이, 가깝게 다가가 마주 보는 장면은 없다. 그렇다고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거나 무관심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 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아빠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그곳이 지금 내게 허용된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기, 거기서 보이는 아빠의 모습이 엄연히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그 시점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도 인정하기. 그렇게 40년을 나와 아빠가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그래서인지 작품은 고요하고 차분한 마무리로 향하고, 나의 1인칭은 관조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뉴-월드 관광> (2024)은 나와 엄마, 아빠 그리고 자매들이 모두 함께 바다로 떠난 1978년의 여름을 다룬다. (<뉴-월드 관광>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이 작품은 노스탤지어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모든 것은 가족 앨범 속에 남아 있는 사진들에 담겨 있다. “찰칵!” 사진의 찰나적 포착은 시간을 멈추고, 시간의 흐름 속에 균열을 내는 광학적 흔적이다. 기억을 둘러싼 감각들이 사진 이미지에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앨범을 펼쳐 사진을 본다는 것은 멈춘 순간에서 시간과 감각과 기억과 경험을 다시 펼쳐내는 일이다.
<너의 근원>의 엄마, <40>의 아빠가 젊은 날의 모습으로 <뉴-월드 관광>에 등장한다. 감독 이문주의 현재 보다 더 젊은 날의 모습으로.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주요한 시선이 있다. 하나는 가족의 모습을 찍는 카메라, 즉 아빠의 시선이다. 아빠는 가족 내부가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가족을 바라본다. 또 하나는 가족을 바라보는 1인칭, 나의 시선이다. 이 시선을 따라 카메라를 든 아빠가 드러난다. 카메라를 가운데에 두고 아빠와 나는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아빠-카메라의 시선과 나-1인칭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에 엄마가 있다. 아빠의 카메라는 엄마와 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는 엄마를 옆에서 올려다본다.
이렇게 담아낸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해낸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문주는 <뉴-월드 관광>을 카메라의 광학적 기록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대신, 1인칭이라는 스스로의 주관적 시점을 통해 아빠와 엄마의 위치와 모습을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기억과 경험 속에 있어야 할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아빠와 엄마는 더 이상 상실의 대상이 아니다. 소실점 너머로 사라질 대상이 아니다. 상대를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Epilogue
글을 준비하고 쓰면서 1인칭 시점의 의미를 나 스스로 묻고 있었다. 하마터면 폭력의 시대로 회귀할 뻔한 위급한 시기, 동시간대에 들려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내가 찾고 있던 답이 담겨 있었다.
“... 저와 나란히 비를 피하는 사람들과 길 건너편에서 비를 피하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나’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경이로운 순간이었고,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했습니다...”
한강은 이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문학을 써 나갔다. 나는 이문주의 작품들을 보면서 시점과 상실의 관계를 천천히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1인칭은 나 이외의 다른 이를 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1인칭을 만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되뇌면서 말이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