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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 NOH Gyeongmu


출생률 0.4%인 2030년 대한민국에 남성임신이라는 타개책을 제시한 <안 할 이유 없는 임신>(2023)의 노경무 감독을 22대 총선 당일 웹툰융합센터에서 만났다. 파격적이고 선동적인 두 번째 작품과 달리 데뷔작 <파란 거인>(2021)은 깨달음의 여정을 그린 명상적인 작품이다. 같은 사람의 작업이라고 선뜻 믿기 어렵다. 실마리는 2017년에 나온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에서 풀렸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단편 만화와 소설 삽화, 여행책에 전시까지 부지런히 활동했다. 애니메이션은 2020년 부산, 2022년 서울,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짓기 전에는 무엇을 했을까. 


2024년 4월 인터뷰

우연과 내공


창작자 이전의 삶


마산에서 태어나셔서 고등학교 때까지 있었나요. 의상학과에서는 뭘 배우나요?

옛날에는 가정대였고 생활과학과 분과라서 의류에 관련된 거는 다 가르쳐줘요. 옷 만드는 수업도 있고 복식사 수업도 있고 디자인 수업도 있고 마케팅 수업도 있어요. 제가 지원했을 당시에는 이과나 문과 둘 다  지원을 할 수 있는 과였어요. 저는 이과였거든요. 수학을 너무 못해서 수학 점수를 빼고 갈 수 있는 데를 찾아봤어요. 옷을 좋아하긴 했어요. 어렸을 때도 패션 잡지 보는 거 좋아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여기로 가볼까 결정하게 됐습니다.


미술이나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었군요.

디자이너를 진로로 선택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진짜 못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패션 업계 의류업계 쪽에서 일해야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하셨던 거예요.

네, 졸업하면서 의류 OEM 주로 하는 회사들이 있어요. 영원무역에서 스키복 생산 담당자 일을 했었어요.


OEM 회사에서 방글라데시 업체랑 소통하셨는데, 더운 나라에서 스키복을 만들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맞아요. 방글라데시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담당한 옷이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자재가 제때 도착했는지 지퍼가 길이가 맞게 왔는지 그런 거를 생산 라인 돌아다니면서 체크하고 만약에 잘못되고 있으면 담당자를 불러서 같이 얘기하고 바이어 님한테 이거 좀 익스큐즈 해줄 수 있니 메일도 쓰고 그런 역할을 했었어요.


3년 정도 일하고 나서 유럽 여행 갔다가 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응급실로 바로 갔었거든요. 갔더니 원인 불명의 면역 질환이다 해서 그때부터 한 2년 정도는 거의 치료만 했어요. 


직장인 때부터 취미 미술 화실을 다녔는데, 풍경 보고 수채화와 모사하면서 만족하는 정도였어요. 입원해서 치료하는 동안 그림 끄적거리면서 뭔가 에너지는 많이 있는데 회사도 안 다니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너무 심심했어요. 제가 블로그에 일기 같은 걸 많이 썼는데. 화실 선생님이 제 블로그를 보고 이야기 책을 만들면 어떻겠냐 제안해 주셔서 화실에서 그런 데 관심 있는 네다섯 명이서 모여서 만화나 그림책 만드는 수업을 했어요.


그게 수경화실이었어요. 선생님이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나와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화실 다닐 때 KAFA10주년 상영회에 가서 <로망은 없다>(감독: 박재옥, 수경, 홍은지, 2009)를 본 적 있어요. 근데 그때는 여기에 내가 입학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릴 때도 그림 그리는 거에 좀 취미가 있었나요?

좋아했어요. 


대학 진학할 때는 그림은 취미지 생각했던 건가요?

저희 아빠가 입버릇처럼 그런 식으로 말했었거든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미대에 간다고 생각 전혀 못했던 것 같아요.


불에서 나온 사람 (2017)


『불에서 나온 사람』은 그런 제안을 받고서부터 생각을 했나요?

그때 블로그에다가 내가 유럽에서 얼마나 아프고 어떤 시련을 거쳐서 한국 응급실까지 오게 됐는지 썰을 풀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재밌게 읽으셨나 봐요. 그렇게 아프면서도 여행을 계속했던 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 하셔서 ‘내 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하고 시작하게 됐었어요.


처음에는 웹툰 콘티를 했거든요. 한창 유럽에서 겪었던 일을 그리고 있었는데 수경 선생님이 극적으로 연출시키는 이야기 말고 꾸며내지 않은 감정이나 인상을 그림책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라고 또 제안을 해주셨어요. 제가 너무 열이 많이 나서 고통스러우니까 웹툰 콘티 중에 장작불에 제가 타고 있는 그림이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출발해 보는 게 어떻겠냐 하셔서 그리게 된 게 『불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활활 타고 있는 불 속의 숯검댕이 같은 인간을 부르는 새가 있어요. 불에서 나온 인간이 새를 쫓아서 물가로 가죠.

의도를 가지고 어떤 상징을 넣은 건 아니에요. 새는 막연하게 투병 시절에 나를 도와줬던 주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새가 주축이 되지만 다른 동물들도 나오잖아요. 그림책 콘티를 수업시간에 가져갔는데,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이 새는 자기잖아” 하는 거예요. “네가 너 자신을 그렇게 깨운 거잖아”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내가 그런 의미로 새를 그렸구나’ 뒤늦게 깨달았어요.  



호원: 그림 중에서 (불에서 나오는 사람을) 연속된 동작으로 그리신 게 있더라고요.

그림책에서 그런 기법을 많이 쓰더라고요. ‘좋아 보는데?’ 이러면서 따라한 거죠.


출판과 유통은 어떻게 했나요?

제 돈으로 찍은 거예요. 공모전 같은 거 내기도 했는데 다 떨어졌었고 ‘이왕 만든 거 명품 백 하나 샀다고 생각하지 뭐’ 이런 생각으로. 흑백 책 2~300권 찍는데 한 200만 원 정도 들었던 것 같아요. 출판사 이름을 빌려주는 데가 있어요. 거기서 ISBN 찍어주고 유통도 해줬어요. 판매 대행으로 40% 떼가고.


저는 동네 도서관 어린이 도서 열람실에서 봤었거든요.

아동 그림책으로 분류가 돼서 그런지 도서관에 들어있더라고요. 그림책은 알아서 사주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불안을 걷다  (2018)


그림책 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 취업을 했어요. 그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또 다른 만화 워크숍에서 만화를 그렸다는 거예요. 저도 따라 그 워크숍에 가서 만화 콘티까지 완성했어요. 그러고 나서 몸이 안 좋아져서 한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불안을 걷다』 작화를 했어요.


『불에서 나온 사람』처럼 개인적인 경험이 내용에 반영된 것 같아요.

다시 아프게 돼서 또다시 치료를 받아야 된다는 막막함이 있었어요. 첫 장면처럼  의사 선생님이 “넌 지금 (재발하는) 스위치에 손을 대고 있는 거나 똑같다” 말하는 상황에서 너무 무섭고 불안하고 걱정됐어요. 


병을 나랑 똑같이 생긴 소녀라고 생각하고 그린 거예요. 도플갱어 보면 죽는다는 미신 있잖아요. 만화 내내 나랑 똑같이 생긴 애가 나를 따라다니는 게 병마가 나를 따라다니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렸어요. 걔가 학교에서 도망을 치고 정처 없이 걸어 다니면서 죽은 새를 보고 시체를 묻어주면서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가 된 게 아닐까.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자기를 똑같이 닮은 아이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어요.



『불안을 걷다』의 새는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왜 새를 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평소에 새를 좋아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나요?

네. ‘이때는 이런 상징을 써야지’ 하기보다는 정말 떠오르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만화책 제작 과정은 어땠나요?

만화책도 제 돈 주고 찍었어요. 무선제본이라서 돈이 적게 들었어요. 회사 그만두고 나서 되게 아팠는데도  계속 매달렸던 것 같아요. 방구석에서 다 그리고 난 다음에 직접 독립서점에 배포했어요. 유어 마인드 입점이 되니까 잘 뚫리더라고요. 소녀가 나와서 그런지 불 그림책보다는 조금 반응이 있었어요. 작품 자체를 만드는 것도 재밌었지만 팔리는 거 보니까 너무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불안을 걷다』 외에도 「심연」(2018), 「메아리」(2019) 같은 단편 만화를 발표했어요. 이때는 만화가로서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었나요?

생계 수단으로서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재밌어서 계속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 KAFA에 가게 된 것 같아요.


이때 활동한 MMOS(Making My Own Story)는 수경화실 동문 모임인가요?

맞아요. 그때 우리끼리라도 같이 계속해 보자. 한 명은 간호사고 한 명은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다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모였던 거라 뭔가 강제가 없으면 우리가 절대로 다시 손을 안 댈 것 같으니까 같이 책을 만들고 같이 마켓에 나가자 한 거예요. 지금은 흐지부지해졌지만 친구 관계로서는 계속 남아 있어요. 


파란 거인 (2021)


독립 만화 작업을 하다가 KAFA를 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뭔가요?

두 번째 아프게 되고 나서는 서울 집을 정리하고 마산에 내려왔어요.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영어학원 선생님밖에 없더라고요. 파트타임으로 영어학원 선생님을 1년 정도 했어요. 답답했어요. 그림책이나 만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있었거든요. 그때 화실을 같이 다녔던 친구가 “언니 집 근처에 KAFA 있어요” 이러는 거예요. 서울에 있는 거 아니었냐고 했더니 부산으로 옮겼대요. 

 

영상을 하려고 간 건 아니고 거기 가면 시나리오 쓰는 방법이나 내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는 거는 확실히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마산에서 부산이 멀지는 않지만  통학할 거리는 아니지요.

기숙사가 있어요.


이때까지 그림은 그려봤지만 애니메이션 경험은 없었잖아요. 

그전에도 영상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림책 만들면서 약간 친해져서 수경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유튜브 편집을 제가 도와드리게 됐어요. 베가스 편집했는데, 선생님이 그림 그리는 거 찍고 자막 달고 “선생님 이번에는 미소년을 그리는 콘텐츠를 하시죠”, “유화 커리큘럼은 이런 제목을 합시다” 이런 식으로 어떤 콘텐츠를 하면 좋을지 구성하는 게 너무 재밌었거든요.


제가 애니메이션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지만, 들어가서 과제로 5분짜리 자기소개 영상을 만들었는데, 클립스튜디오 30일 무료판으로 발로 그린 것 같은 애니메이션을 처음으로 만들어봤는데 되게 재밌더라고요.


호원: 입학 시기가 코로나 때였어요.

애니메이션은 딱히 장소에 제약이 없으니까 별 타격을 못 느꼈어요.


동기가 몇 명 정도죠?

전체가 20명 정도고 애니메이션과는 딱 3명이었어요.


같이 듣는 수업도 있고 따로 듣는 수업도 있나요?

같이 듣는 수업은 [영화 비평 수업] 딱 하나 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1년 과정이었는데, <파란 거인> 앞에 다른 습작을 했나요?

3명이서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어요. 3명이 같이 공동으로 이야기를 짜고 실사 촬영본 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움직이는 걸 얹는 식으로 하나 만들어봤어요. 그때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팅을 해보고 ‘3초 만드는데 3시간이 걸리네’ 조금 충격받았어요. 그때 ‘나는 반드시 애니메이터를 구해야 되는구나’ 깨달았죠.


<파란 거인> 작업 기간은 1년이 안 됐겠네요.

4월쯤에 졸업작품으로 뭘 할 건지 가져와보라고 했을 때 <파란 거인> 말고 엉뚱한 얘기를 갖고 있었는데, 계속 막히던 상황이었어요. 이정호 선생님이 3명이서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기획을 할 때 제가 갖고 온 아이템이 괜찮다고 졸업작품으로 하라 하셔서 4월부터 스토리 개발을 해서 1월 정도에 마무리한 것 같아요.



<파란 거인>과 『불에서 나온 사람』 이미지가 비슷해요. 근데 속성이 다르죠. 그때는 불이었고 이번엔 물이에요. 

『불안을 걷다』 책을 만들고 나서 워크숍 주도했던 선생님이랑 오랜만에 모임이 있었거든요. 그 선생님이 제 만화를 보고 “생각보다 괜찮네요” 하셨는데, ‘내가 이거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이런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요. 화가 나면서도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거예요. 그때 종이를 반으로 접고 반으로 접고 또 접고 접어서 웹툰도 아니고 슬라이드 형식으로 스크롤하면서 보면 점점점 작아지는 그림을 그려서 블로그에 올렸어요. 


이거를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지만 종이가 주인공이면 10초 만에 끝나니까 종이를 움직이는 사람으로 바꾸고 이 사람이 작아지는 걸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작아지는 거는 확고한데 얘를 어떻게 키우지? 처음에는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눈물로 집이 차올라 눈물에 불어서 커진다는 얘기였다가 3개월 동안 멘토링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렇게 바꿨다가 저렇게 바꿨다가 집 크기를 키웠다가 작게 했다가 결국은 현재 얘기로 바꾸게 됐어요. 


주인공이 물의 속성을 가지게 된 거는 그저 사이즈를 키워야 했기 때문인 건가요?

보통은 우울한 감정을 파란색으로 표현하니까 제가 그 색깔을 선택한 것 같은데, 물의 속성이다 이러면서 파란색으로 선정을 한 건 아니었어요.


차를 마시고 갈라진 땅을 찔끔 물로 적시는 표현도 나오잖아요.

그러네요. 


<파란 거인> 캐릭터디자인

이야기를 개발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시나리오 선생님이 난감해했어요. KAFA 애니메이션은 내러티브가 강한 극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이 많으니까. “<파란 거인>같이 개인적인 감상이나 인상에 따라 주관적으로 바뀌는 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이왕 (KAFA) 들어온 김에 그거 말고 3막 구조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정호 선생님이랑도 거의 매주 멘토링을 하는데, 내용이 은유적이다 보니까 누구나 자기의 삶을 대입해서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다 다른 얘기를 하는 거죠. 스토리를 개발할 때 갈팡질팡을 많이 했었어요.


되게 고전적인 이야기예요. 외모도 단순한 인간 형태인 데다가 세상으로 나가서 시련을 겪고 깨달음 얻으니까 원형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이 들어요.


호원: 『불에서 나온 사람』은 그림책이고 『불안을 걷다』는 짧은 만화책이고 <파란 거인>은 애니메이션이고, 세 개 다 다른 포맷으로 작업을 하면서 각자의 속성에 따라서 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를 경험을 하신 거예요. 풀어 나가는 게 달랐을 것 같아요.

<파란 거인>도 그림책을 만들 생각으로 한 것 같아요. 카메라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되게 평면적으로만 움직여요. 한 작품으로 세 가지를 해본 게 아니니까 내가 미디어 속성에 따라서 이야기를 다르게 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호원: 카메라 워크가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서 저는 2D 드로잉 맛이 훨씬 더 산다고 보거든요. 움직임을 통해서 고전적인 이야기를 참 애니메이션 맛나게 잘 살렸는데, ‘왜 이게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이지?’


그전에 『불에서 나온 사람』과 『불안을 걷다』가 있었죠.


호원: 저는 영상 올려주신 것 맨 끝에 “요즘도 불에 들락날락 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  ‘무슨 소리지?’ 그랬는데, 지금 얘기 들으니까 상황을 알겠어요. 자기 내면의 아픔이라든가 상처라든가 트라우마를 갖고 길을 떠나서 치유를 하고 회복을 하는 고전적인 여정의 드라마는 어떻게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느냐에 승패가 갈리는데, <파란 거인>은 애니메이션 내공이 쌓인 사람이 표현을 했을 법한 움직임이어서 왜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이 안 보이는 건지 계속 궁금했었거든요.


이미지 작업은 그전부터 해본 게 있는데 애니메이팅으로 구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래서 반드시 애니메이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아카데미 동기(강유민 <창가로 나온 사람들>(2021))가 진주에서 경남예술고등학교를 나와서 거기 동창 후배(김지원)가 진주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 친구가 두 달 동안 부산 기숙사에서 저랑 같이 먹고 자고 학교로 출근했어요. 제가 몸으로 보여주면 그 친구가 그려주는 식으로 옆에서 항상 동기화된 느낌으로 했었어요. 애니메이팅이 좋아 보였다면 다 그 친구 덕택이 아닌가 싶어요.


호원: 연출은 잡아놓고

그렇죠. 애니메틱을 정말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애프터이펙트를 처음 해보는 거였어요. 제가 거기에 너무 매달리고 있으니까 동기가 “누나 이것만 계속하고 있으면 안 돼요. 배경도 그리기 시작해야 돼요.” 거의 프로듀서나 마찬가지였어요. 스토리보드를 오랫동안 잡고 있다 보니까 아트도 자동적으로 개발됐어요. 제가 그리는 스토리보드에 너무 자신 없어하니까 이정호 선생님이 특강 선생님 불러서 저만 스토리보드 연출 점검하는 시간도 따로 가지고 그랬었어요.


저는 작품 첫 장면 좁은 집 안에 거대한 사람 이미지를 봤을 때 정다희 감독의 <의자 위의 남자>(2014)랑 얀 슈반크마이예르의 <어둠, 빛, 어둠 Darkness, Light, Darkness>(1989)이라는 작품이 떠올랐어요.

<파란 거인>을 기획할 때 이정호 선생님이 <의자 위의 남자>라는 작품을 봐봐라 하셨는데, 아트가 너무 멋졌는데 단번에 이해할 수 없어서 엄청 여러 번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나요. 아무래도 봤으니까 참고가 됐을 것 같아요.



첩첩산중과 가시나무 숲은 이야기에도 필요하겠지만 감독님이 여행자이지 않습니까? 혼자서도 많이 다니셨죠.

산에 올라가서 회복하는 것도 제가 등산하는 거에서 가져온 거예요. 산 위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것도 저희 동네 뒷산에서 제가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잡은 레이아웃이에요. 마산에 있어요.


호원: 한정된 자기 공간에서 세팅을 하면 감독으로서는 이 공간 밖으로 나갈 건가 이 공간 안에서 해결을 할 건가 선택해야 하는데, 감독님은 길을 떠나는 여정으로 잡으셨어요. 길을 떠나는 게 먼저 세팅이 되고 제한된 공간 안에 갇힌 게 나중에 세팅된 걸까. 자연스럽게 갇혔다가 나갔다가 돌아오는 걸까 궁금했어요.

집 안에 있는 거를 먼저 떠올린 것 같아요. 당연히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호원: 아까 정다희 감독 얘기했지만 정유미 감독 같은 경우는 인형 상자 안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이야기의 가장 핵심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안 나간다 이 문제도 있는데

저는 일단 나와요.


파란 거인 (2021)

남해 여행자 (2018)


일단 나간 김에 여행 얘기를 해볼게요. 2018년 말에 『남해 여행자』도 내셨잖아요.

그때 항상 그림을 그리면서 어디 돈 나올 구석이 없는지, 공모전 사이트라든지 찾아봤아요. 출판사도 운영하고 마을 학교도 운영하는 지리산에 있는 협동조합에서 남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림 여행기를 쓸 작가를 공모하는 게 있어서 ‘가깝고 좋네’.


그전에도 수경화실 다니면서 밖에 돌아다니면서 그림 그리는 소모임이 있었거든요. 그런 데 제가 자주 다녔어요. 그동안 여행 드로잉 했던 거 많으니까 포트폴리오 꾸며서 지원을 했어요. 인세를 먼저 받아서 여행 자금을 하는 식으로 작업을 했어요. 집에서 남해는 한 2시간만 가면 있으니까 짬 날 때마다 1박 2일씩 틈틈이 봄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가고 이런 식으로 돌아다녔어요.


호원: 여행 스타일은 어떤가요?

저는 계획을 별로 잡지 않는 편이에요. 특히 혼자 있으면 더 자유롭게 다녀요. 그때는 책을 쓰게 됐으니까 콘텐츠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괜히 히치하이킹도 하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데도 들어가 봤어요. 파독 전시관에서 본 독일에서 한국으로 보내온 편지들이 구구절절하고 너무 애틋하더라고요. 지금도 혼자 여행하는 거를 좋아해요. 



<파란 거인>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한 거죠.

네. 머리털 나고 영화제를 처음 가봤어요. 사실 계속 애니메이션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파란 거인> 만들 때도 이거는 내 인생에 한 번 있을 경험 정도였고 ‘완성만 하자’ ‘중도 포기만 하지 말자’ 이런 생각으로 해서 학교에서 “전주국제영화제에 낼 거니까 언제까지 내세요” 할 때 “(콧방귀 뀌며) 무슨 전주국제영화제야" 이러면서 냈어요. 실사 영화 쪽 애들이나 가는 데라고 생각했거든요. 영화제 갔을 때도 영화를 상영해서 기쁜 것보다 배지 뽕을 뽑겠다는 느낌으로 하루에 3~4편씩 보면서 영화제를 즐기느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때 ‘영화가 재밌는 거구나’ ‘시네필이라는 게 이런 건가’ 했어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파란 거인> GV

호원: 첫 영화제에서 상영을 하고 GV를 하는 게 멋진 기회인데 하필 코로나여서

그래도 그때는 아주 초기여서 현장 GV가 있었어요. 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제가 GV 하는 거 보고 “너 되게 심약한 예술가처럼 얘기하더라”(웃음) 처음이라 너무 떨리니까 조곤조곤 말했거든요.


HOUNDSTOOTH


<파란 거인>을 발표하고 결이 맞는 독립 작가들이 하운즈투스로 모인 건가요?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니까 다른 영화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런 작품은 이런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구나’ 그렇게 여러 가지를 보다가 김승희 감독님 작품도 보게 되었어요. 너무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KAFA 들어왔을 때 저도 에세이 같은 걸 냈는데, 교수님이 “이거는 애니메이션이 안 돼. 그냥 만화로 그려” 이랬는데, 김승희 감독의 <호랑이와 소>(2019)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에세이로도 충분히 멋있는 애니메이션 만들 수 있네. 이 사람이 해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팔로우를 하고 있었어요. 김승희 감독님이 하루는 자기가 해외랑 협업해서 제작하는 썰을 풀겠으니 오고 싶은 사람은 구글 미트에 들어와라 그래서 ‘이 사람 무슨 얘기하나 들어볼까’ 이러면서 들어갔었어요. 그 이후에 김승희 감독님이랑 우진 감독님이 콜렉티브를 만드니 참여하겠냐 한 거예요. 서로 처음부터 다 알지는 못했어요. 알음알음 들어와서 만나게 된 거예요.


멤버가 12명이잖아요. 인원수를 정해놓고 모은 건가요?

처음에는 출퇴근 인증이라고 해야 되나. 규칙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서 단체 카톡방을 만들었어요. 일 시작할 때 시간 딱 찍어서 ‘나 출근했음’’ 퇴근했음’ 인증하는 카톡방에 20명 가까이 있었어요. 한 1년간 모임이 유지됐는데, “우리 오프라인으로도 만납시다” 해서 마침 서울시청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주는 공간을 신청해서 감독님들이랑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만나서 얘기하고 조금 친해졌어요. 1년이 지나고 모두들 제작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단톡방을 닫았고 김승희 감독님이랑 우진 감독님이 제대로 해보자 생각하셨나 봐요. 작가들과 제일 처음 할 일로 달력을 생각해서 12달이니까 12명을 모으자.


감독님이 1번 타자였잖아요. 제비 뽑기였나요?

제가 한다고 했어요. 주목을 많이 받으니까 제일 처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눈 맞는 부처님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겨울에 반드시 내가 해야 된다.


2023년에 달마다 인터뷰를 하고 2024년에는 대담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섰어요.

중학생 때 혼자 녹음을 하고 놀았어요. 내가 라디오 DJ인척 진행도 하고 가수인 척 노래도 하고. 엄마 불경 테이프를 내 목소리로 엎어버리고 놀았어요. 내가 채널을 개설할 에너지는 없었는데, ‘한다니까 내가 해볼까’ 이런 생각이었어요.


진행을 잘하시더라고요.

대본이 있습니다. 저는 얼개가 없이는 시작 안 하는 편인데, 3월 거는 두 분 감독님이 제가 짜놓은 대로 안 하시는 거예요. 완전 진땀 흘렸어요. 내가 즉흥형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계획대로 안 돼서 스트레스받는 거 보니까 계획형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에 계신 멤버도 있으니까 녹음이나 만남은 온라인으로 하시나요?

온라인으로 하는 편이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끼리 전시를 보러 가거나 종종 만나기도 합니다.


호랑이 뒷다리 (2023)


<NCT 127: The Lost Boys>(2023)나 <호랑이 뒷다리>(2023) 작업은 애니홀과 같이 했던 거죠?

제가 비상근 직원처럼 있으니까 저한테 들어온 의뢰를 “여기서 제작할게요” 해서 진행한 거예요.


호원: <홍길동>(감독: 신동헌, 1967) 블루레이 버전을 할 때 노경무 감독님도 코멘터리로 들어오셨잖아요. 예전에 DVD 타이틀 때는 저랑 연상호 감독님이랑 얼떨결에 했었는데

저도 얼떨결에 했어요.(웃음)


호원: <홍길동> 67년 버전을 지금의 감각으로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도대체 뭐지?’ 67년 버전의 아우라도 그렇고 권위라는 게 너무나 커서 후배 애니메이터들이 감히 터치를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이날치를 앞에다 세워서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에서 봤던 ‘내가 너희 마음껏 조롱해 줄게’가 <호랑이 뒷다리>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고추들을 보면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됐나?’

제가 몰라서 더 가능한 것 같아요. 어떤 아우라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그런 게 아닌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직접 제안이 온 건가요?

사실 저 땜빵으로 들어간 거예요. 전승배 감독님이랑 김보슬 감독이랑 박재범 감독 이렇게 3명이었거든요.

근데 박재범 감독이 바빠져서 제가 대신 들어가게 됐어요. 제작비가 엄청 작아서 계속 망설이다가 영상자료원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해서 그럼 하겠다고, 댄스 비디오로 할 생각으로 수락했어요.



호원: ‘아니 저 나쁜 탐관오리가 훌륭한 래퍼였단 말이야?’ 거의 샘플링하다시피 처음에 기가 막히게 립싱크가 맞고 완전히 지금의 인물 움직임으로 하면서도 백그라운드는 67년 거를 그대로 갖다 쓰기도 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서(웃음)


호원: 능청스러우면서도 저 힙한 감각은 뭐지? 되게 희한했어요.


자료원에서 영상 소스를 받아서 작업하신 건가요?

네. 캡처를 뜨기 전에 어떤 음악을 해야 될까 고민했을 때 이날치 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일단은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장영규 감독님한테 이날치 음악 좀 쓰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날치를 설득하기 위한 기획서도 따로 만들었어요. 제 기획서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영규 감독님이 그냥 해주자고 해서 된 것 같아요. 


원래 있던 곡으로 하신 거 아닌가요?

욕심은 새로 작업하는 거였는데, 제작 기간이 너무 밭아서 있는 곡에서 고르기로 했어요. 사실 내용에 관계없이 이날치 노래 중에서 제일 짧은 걸로 고른 거예요. 고르고 나서 가사 내용을 파악하고 그 곡으로 이날치 밴드에서 라이브 공연한 동영상 다 봤어요. 멤버들이 자라랑 호랑이가 대립하는 구도로 마주 서서 공연하는 영상을 보고 변사또랑 홍길동이 대치하는 구조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호랑이 뒷다리>로 결정을 하게 됐고 스토리보드부터 짜는데 곱단이가 아무것도 안 하기 좀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칼자루는 곱단이한테 주자’ 그래서 차돌바위 도끼를 곱단이가 들고 끝장을 내는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됐어요.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노래를 고른 게 아니라 우연의 연쇄로 디벨롭된 거예요. <수궁가> 내용 알아도 옛날 언어로 적혀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안 와닿는데 이날치 라이브 공연 영상을 보니까 대립 구도가 눈에 탁 들어왔어요. 그 영상을 안 봤으면 그 애니메이션은 못 만들었을 것 같아요.


제작 기간이 얼마나 걸렸어요

제작 기간은 3~4개월. 사실 애니메이팅이 약간 부끄럽긴 한데, 시간이 더 많고 돈이 더 많았으면 그들이 훨씬 더 춤을 잘 췄을 텐데 그런 게 아쉽긴 하지만 


호원: 이날치가 추구하는 음악, 전통적인 거를 현대적으로 만드는 거랑 신동헌 감독의 오리지널을 현대 감각에 맞게 리메이크한 게 접점이 되기도 하고 이날치의 곡이랑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이라든가 표현도 잘 맞고 전체적으로 꼼꼼하게 계산이 된 느낌이 좋았어요. 이게 <안할 이유 없는 임신> 다음에 만든 거라 내가 아는 외향형 노경무의 노선을 연결을 하는데, 문제는 이거랑 <파란 거인>을 어떻게 붙이지?

저도 사실 제 자신이 연결이 잘 안 돼요. <파란 거인>은 정말 조용하게 두 명이서 나란히 앉아가지고 묵묵하게 작업하는 스타일이었고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대여섯 명의 스탭이 있는 공간에서 항상 얘기하고 교류하면서 만든 거거든요. 접점을 저도 잘 못 찾겠어요. 그냥 필요해서 발휘한 게 아닌가.


호원: <파란 거인>을 만들기 전에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지금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애니메이터들이 조직 내에서의 관리에 되게 취약했는데, 뭔가 큰 프로젝트에서 내가 판단을 해야 되는 상황일 때는 직장의 경험이 쌓여있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은 회사에서도 저는 공장 편이었거든요. 바이어를 위해 봉사한다기보다는 공장의 이익을 좀 더 내줘야 우리 회사의 이익이 커지는 상황이었어요. 어쨌든지 생산이 잘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디자이너가 여기서 a 종류의 지퍼를 써달라고 했는데 실수로 b의 지퍼가 온 거예요. 원칙대로라면 a 지퍼를 다시 주문해서 달아야 되는데 바이어한테 b로 하면 안 될까 해서 펑크가 안 나게 하는 역할이었어요. 그런 습성이 애니메이션 제작하면서 나온 것 같아요.


OEM 옷 제작이 엄청난 규모이지 않나요. 공장 단위로 옷을 만들 때 담당한 규모의 감각이 있어서 감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스키, 보드복 만들면 자재가 진짜 많거든요. 홍콩에 있는 지퍼에서 대만에 있는 원단을 제가 직접 다 발주를 했어요. 배로 실을지 비행기로 실을지를 결정하고 모든 자재가 맞춰지는 날짜를 딱 해서 “공장아 이때 온대” 하는 사람이었다 보니까 애니메이션 만드는 일도 크게 안 다른 것 같더라고요.


호원: 애니메이션어워드에서도 대리 수상을 맡기고 만화책도 론칭을 하기 위해서 간다는 게 내가 보지 못했던 애니메이터의 스케줄이어서 감독님 주변에는 팀이 이미 짜여 있고 그거를 끌고 나가는 리더십이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마치 장수의 느낌이었어.

제가 그리는 스킬이 없고 아름다운 레이아웃을 짤 줄 모르고 동화도 잘 못해요. 제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잘 보여야 해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를 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나요?

생각은 해봤어요.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을 만들고 있을 때던가. 이정호 교수님한테 “제가 어떻게 뭘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요?” 말씀드리니까 단편 영화를 한번 찍어보라고 그러면 영상 문법을 빨리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때 좀 알아보긴 했어요. 단편 영화 찍는 아카데미 많으니까 인터넷으로 살짝 알아보고 ‘아 아닌 것 같아’


영화는 아니다 

학교에서 동기들이 찍는 거 보면서 ‘고되다 고되’ 이런 생각도 많이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애니메이션이 훨씬 더 잘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배우의 쪼도 있고 배우에 맞춰서 쓰기도 하고 배우가 진짜 중요하잖아요. 내가 배우를 컨트롤할 자신도 없었어요. 또 애니메이션은 본 작업 들어가기 전에는 끊임없이 고칠 수 있는데, 영화는 한 번 찍어놓으면 고칠 수가 없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벽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을 쓰면서 엄청 만화적이고 과장된 연출을 많이 하다 보니까 일반 배우들이 하면 일본 드라마 같겠다는 생각도 들고.


NCT 127: The Lost Boys (2023)


NCT 다큐멘터리 작업은 <호랑이 뒷다리> 다음에 들어간 건 가요?

KIAFA(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통해서 연락이 온 것 같아요. 내가 안 해본 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왠지 아이돌 그림은 예뻐야 될 것 같고 그냥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런 서정적이고 예쁜 분위기가 어렵더라고요.


내가 구상한 대로 안 나왔다는 뜻인가요?

내가 평소 보던 일본 아니메 스타일을 내가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돼서 “하아~ 너무 자만했군.”(웃음)


이때는 직접 다 하셨어요?

스토리, 애니메틱 만드는 것까지 하고 디렉팅만 했는데, 춤을 추는 것도 어렵고 특히나 총감독과의 교류가 어려웠어요. 제가 짜간 스토리보드를 보면서 “감독님 이런 스토리보드는 제가 찍으면 돼요. 저는 애니메이션적인 걸 원해요”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적인 게 뭐지’ 스스로 질문했죠. 아직 답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말하는 거는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거구나. 


여러 애니메이터들이 다 다른 스타일로 작업을 했잖아요. 스타일은 섭외했을 때부터 결정된 거예요 아니면 이야기 담당 분량을 받고 아니메 스타일로 정하신 거예요?

보고 나서요. 그분들은 <파란 거인>밖에 안 보고 컨택을 준 거라서 자기들도 반신반의인 거예요. ‘이 사람이 아이돌 다큐 애니메이션 할 수 있을까’ 이런 분위기였는데, 그들이 보내온 시나리오는 어렸을 적의 인물을 재현하는 거였기 때문에 캐릭터 애니메이션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예쁜 캐릭터를 그려야겠구나 생각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작업하는 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한 4개월 5개월 걸린 거 같아요.


스토리보드부터 쭉

네.


전체 완성된 거 보니까 어떻던가요?

다른 감독님 거 보면서 ‘이렇게 했었어야 됐구나!’(웃음)


길을 만드는 여성들 (2021)


<길을 만드는 여성들>(2021년 11월 2일~13일, 갤러리 바인딩) 전시는 마산에 있을 때였나요?

KAFA에 입학하기 전에 영어 강사를 하고 있을 때 그림책이나 만화책 하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아서 지역에 있는 사람을 찾았어요. 찾다 보니까 비슷한 사람이 2명 있었어요. 자기 작업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우리끼리의 마감을 만들어서 진도를 나가자는 목적으로 몇 주에 한 번씩 만났어요. 거기서 친해진 작가님이랑 이번에 뭐 하나 해보자 얘기가 나왔어요. <파란 거인> 다 만들고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을 시작하기 전 약간 공백이 있었는데, 장편과정에 입학할지 안 할지 모르는 시점이었어요. 합격 못할 수도 있으니까 지원 사업이 있으면 뭐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작가님이랑 지역에서 하는 지원 사업에  같이 기획을 냈어요.


공모 주제가 있었나요?

그냥 신진 작가 지원이었어요. 300만 원 주는 건데 그 돈으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사실 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팽샛별 작가님이 “감독님 여성 관심 있어요. 여성?” 그래서 우리 둘이서 지역의 여성 인물들을 그림을 그려보자 한 거예요.


인물들은 어떻게 선정하셨어요?

다행히도 지역 대학에 경남 여성 위인을 망라한 디렉터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보고 팽샛별 작가님은 운동성이 있는 인물들, 무용가라든지 독립운동가처럼 액션이 있는 분을 원했고 저는 문학가라든지 창작하는 사람들을 원해서 각자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만한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가는 사람들을 뽑았어요.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여공들과 한일합섬 여성 배구단을 꼽았던 게 저희가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인이 아니라 활발하게 지역 산업의 일구거나 스포츠를 이끌었던 여성 집단들도 같이 선정한 게 차별점이어서 뽑힌 게 아닌가 해요.


정말 매번 키 포인트를 잘 잡는 것 같아요. 


호원: 상황에 대한 판단력, 적응력, 실행력도 뛰어나시고 유연하게 굴러가는 힘이 있으셔서 “그래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계속 경탄을 하네요.


기억나는 전시회 피드백이 있나요?

저는 많이 못 가봤으니까 방명록만 읽었는데, 여성 이슈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와주셨더라고요.

이런 전시회를 열어줘서 고맙다는 얘기도 좋았는데, 갤러리 관장님의 피드백이 되게 좋았어요. 자기가  지역 작가전을 열 때 오는 사람들이랑은 관객이 달랐다는 거예요. 평소 오던 사람이 오지 않고 되게 색달랐다는 피드백이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시고양이


직장 생활할 때 공장 편이었다고 하셨던 것처럼 여성 노동자들을 나의 위인으로서 선택하셨던 것은 지역과  시기에 맞춘 기획이면서도 감독님의 삶에서 계속 갖고 오는 주제인 것 같아요. 다음으로 이주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했는데, 뭔가 구체화되고 있습니까?

시놉시스를 써서 친구한테 보여주었는데 “네가 지금 쓴 얘기는 너무나 피상적이고 일반적이다. 킥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하고 진전된 게 별로 없어요. 그건 제가 장편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고 고양이가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하나 올해 그릴 예정이에요


나쓰메 소세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가 거기 있는 인간들을 조롱하고 되게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시고양이가 그 집의 가부장을 말로 조곤조곤 때리는 역할입니다. 경남 지역에 베트남 여성이 시집오면서 시고양이와 베트남 여성의 관계에 대한 만화를 기획했어요.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2023)

 

인터뷰 2024년 4월 10일 @ 부천 웹툰융합센터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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