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 Kook Moo Young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대는 아빠와 엄마, 혼자 고고한 오빠와 함께 사는 중학교 1학년 동두희, 똥두 네 집안은 현실 4인 가족의 참모습 같다. 혈육만큼 말본새가 날카로운 단짝 역시 진짜 걔처럼 얄밉다. 등장하는 캐릭터 저마다 매력이 생생한 2권짜리 만화책 『똥두』의 국무영 작가는 신의 손가락으로 한복을 입은 남녀 캐릭터를 지은 <창조기>(2008)와 머리카락 대신 나무뿌리가 뻗친 주인공의 자아 탐색기인 <파인드 미 Find Me>(2009)를 만든 박재영 감독과 동일 인물이다. 2020년 『똥두』를 출간하며 완전히 만화가가 되었나 했더니 2023년에 웹애니메이션 <똥두>를 공개했다. 국내산 무농약 박재영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베일에 싸인 10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똥두 X 똥두
지금 12살 똥두 작업하고 계시나요?
계속 어려지고 있어요. 그다음에 초등학교 3학년 하게 될지도(웃음). 12살 똥두도 두 권 정도 나올 것 같아요. 계약은 비룡소에서 1년 전에 했는데 미뤄졌어요. 이번에 다양성 제작지원이 돼서 그 기간에 한 권 정도는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파인드 미> 이후 애니메이션에서 떠냐셨나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똥두> 웹애니메이션을 공개하셨죠.
네,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웹애니메이션 제작지원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똥두』는 장편이잖아요. 저한테는 단편이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장르였거든요. 내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싶다는 욕구로 시작한 것이 단편이었다면, 장편은 등장 인물도 많고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케미, 감정선이 있잖아요.
2010년에 상상마당 스토리텔링 학교를 6개월 정도 다녔거든요. 거기서 윤태호 작가님이 구체적으로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보다 징검다리처럼 사건들만 뚝뚝 떨어뜨려놓으면 그 안에서 캐릭터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한다는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깐, 그때 들었던 말이 뭔지 조금 알 거 같아요.
그렇게 『똥두』를 10년 정도 준비했나요.
『똥두』만 한 건 아니에요. 하다가 감이당이라는 단체에 공부하러 가기도 하고 『똥두』에서 저랑 가장 멀다고 생각하는 캐릭터, 계숙이 언니를 알기 위해서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에 가서 책 모임도 했어요. 이게 『똥두』 만들기에 포함된 과정이라고 하면 거의 10년이지만 앉아서 이것만 한 10년은 아닌 거죠. 하다가 1년 정도 중단해서 논문도 썼거든요. 도전만화 베스트 도전까지 가서 신생 웹툰 업체에서 컨택했었는데, 틀어지고 공백기가 있었어요.
연재해서 일주일에 한 편씩 내야 했으면, 치고 나가는 힘이 있었을 거 같아요. 근데 연재처도 없었고 제작 지원도 없었고 내가 작업하다가 오늘 죽어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작품이에요. 오로지 나의 의지로 해야 하는 거였어요.
단편 했을 때는 제작지원을 받아서 했기 때문에 1년 안에 해내야 되잖아요. 제작지원되려면 시놉 정리되어 있고 스토리보드 그려서 내잖아요. 나름 체계가 있었는데, 『똥두』 만드는 동안에는 그 모든 체계가 없어졌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 헤매는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10년.
그런 거죠.
원래 만화를 지향하셨던 건가요?
막연히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한 거 같아요. 열정적으로 동아리 같은 곳에서 활동한 적은 없고, 펜촉으로 만화 그리는 체험을 한번 하러 간 정도?(웃음)
중학교 때였나? 동네에서 버스를 타야 하지만 진짜 큰 만화방 같은 곳이 생겼어요. 거의 홍대 북새통문고 같은 느낌으로 크고 전문적으로 만화만 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애림 작가님과 최인선 작가님의 만화책을 보게 된 거죠. 낯설고 신선했고, 그 어떤 만화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두 분 다 비주얼적으로 독특함이 확 느껴지고, 스토리에서도 싸한 느낌이 있었죠. 두 분의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그로테스크잖아요? 그런 거를 10대 때는 좋아했죠.
<창조기>나 <파인드 미>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창조기>는 졸업 작품이었고, <파인드 미>는 졸업 후에, 작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던 시기에 만들었어요. 저는 실기가 없는 디자인 학부를 나왔기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두 작품은 현실 배경이 없잖아요. 제 상상과 많은 자료로 만들었어요.
『똥두』는 현실적인 얘기잖아요. 원래 저의 스타일은 현실적인 이야기 기반이 아니었어요. 저는 10대 시절 내내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고 뭔가 열심히 한 적이 없는 애였어요. 아직까지 화두가 그거예요. 12살 똥두도 ‘열심히 한다는 건 뭔가’ 이런 얘기일 수도 있어요. 걔가 육상부예요. 처음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게 육상이었거든요.
저는 대학교 때까지 뭔가 하고 싶은 욕망만 있지 거기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노력을 한 적은 없었거든요. 강의하러 온 교수님 중 한 분이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려서 휴학하고 잠깐 들어가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는데, 캐릭터 디자인을 잘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뭔가를 잘한다 이러면 우쭐해지고 약간 거만해지거든요.
두희도 달리기에 관심이 없었는데, 12살 인생 처음으로 달리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타고난 재능에 대한 우쭐함이 생겨요. 근데, 처음으로 나간 큰 대회에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창조기 The Record of Creation (2008)
졸업 작품은 만화 「외박」이 아니고 <창조기>였나요?
「외박」은 순전히 재미로 만들었어요. 아무런 목적 없이. 그 작품이 발전해서 졸업작품으로 <창조기>를 만들었어요. 영상디자인학부라 졸업 작품은 거의 영상을 하고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은 소수예요. 저는 CF도 영화도 관심 없었어요. 좀 특이 케이스였던 거죠.
당시에 18분이 넘는 작업은 드물었을 것 같고요.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 도는 감독님이 계속 서로 봐야 되잖아요. 그때 만난 감독님들이 ‘네 거 너무 길다’고. (웃음)
만들 때는 길다 생각 안 했나요?
긴지도 몰랐던 거죠. 저는 애니메이팅을 못하거든요. 누가 해줬으면 좋겠지 내가 애니메이팅을 잘하고 싶은 욕망이 하나도 없어요. 내레이션이 많아서 길어진 거예요.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창조기>가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는데, 심사평에 이애림 작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어요. 이애림 작가님 <연분>(2001)을 보고 <창조기> 형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창세기 형식으로 남녀 감정을 이야기했어요.
20대 때 관심사가 연애, 사랑 아니에요?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자기들끼리 그 세계 안에서 심각하잖아요. 우리가 지금 보면 ‘아 조만간 헤어지겠네’ 이런 생각이 들지만 그들은 로미와 줄리엣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저도 남자친구랑 헤어졌던 가슴 아픈 기억도 있고요. (웃음) 세계가 탄생되는 얘기랑 사랑이 시작되고 진행되며 끝나는 감정의 탄생의 이야기를 성경의 창세기와 접목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은 종교가 없어요. 어릴 때 초코파이 주면 교회 다니잖아요. 저도 띄엄띄엄 가더라도 교회 생활을 했고 성경에 관심이 있었어요. 창세기 앞부분이 시적이잖아요.
저는 종종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보면서, 땅과 하늘이 같은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1장 6절에 “물 한가운데 둥근 공간이 생겨 물을 둘로 나누어라”라는 구절을 보면서, 하늘과 땅이 원래 하나였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상상, 지식으로 습득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성경에서 다시 본 거 같은 느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이게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 같은 건가? 그런 생각도 했었죠.
썸네일만 봤을 때는 2D인 줄 알았는데, 작품을 보니까 3D를 적극적으로 쓰셨어요.
너무 오래된 얘기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손 움직임은 좀 더 입체적이고 다이내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서 3D 잘하는 아이를 섭외해서 제작했죠.
컴퓨터 만지면 안 켜지고 그런 사람이 있죠. 프리미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멈춘다거나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거예요. 프로그램을 익히고자 하는 욕망도 없고 애니메이팅을 잘하고 하는 욕망도 없어. 나는 다만 그림과 이야기를 좋아해. 굳이 애니메이션 아니어도 되잖아요. 만화 그리다가 내 실수로 파일을 덮어쓴 적은 있지만 갑자기 프로그램이 이상하게 된 적은 없거든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받았던 두 번째 작품 <파인드 미> 만들 때 다음 날 제출해야 되는데, 맨 마지막 편집하는 과정에서 통째로 날린 적 있어요. 그 순간 진짜 죽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어떻게 복구했어요?
컷 작업을 애프터이펙트에서 뽑아서 프리미어에 얹어서 최종 편집을 하거든요. 장면을 정렬하면서 호흡 조절할 때 프리미어가 날아간 거예요.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약간 늦게 냈어요. 그때는 진짜 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면 내가 작업을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게 뭐라고 내 인생에서 이거 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 싶죠.
파인드 미 Find Me (2009)
『똥두』는 수작업 베이스로 작업하셨는데, 그전에는 태블릿으로 컴퓨터에서 바로 그렸나요?
저의 첫 캔버스가 디지털이에요. 저는 종이보다는 디지털이 익숙했는데, 편리하잖아요. 수정하기도 쉽고. 근데 이러다가는 그림이 하나도 안 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똥두』는 수작업을 100% 했죠. 그림 실력 좀 늘리려고. 디지털로 작업하면 편리하고 퀄리티는 좀 더 나올 수 있어요.
두 번까지는 애니메이션을 해볼 만했나요?
<창조기>는 처음 만든 애니메이션이고 영화제 나갈지도 몰랐는데, 예상치 못하게 반응이 많이 온 거예요. 기분이 되게 좋았던 시기죠. ‘대학원 가서 교수된 다음에 평생 독립 애니메이션 만들어야지’ 단순한 생각으로 대학원 갔더니 그 루트가 쉬운 것도 아니었어요. 교수되는 사람들은 그 절차에 맞게 노력을 많이 한단 말이에요. 하다 보니까 나한테 안 맞는 것 같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 작업 끝나고 두 번째 제작지원이 연달아 돼서 내가 제작지원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죠..(웃음) 세 번째는 2차에서 떨어졌어요. 그 시기 이후 거의 10년 동안 암흑기가… 세상에서 배제된 채 고립 기를 보냈어요. 그래도 필요했던 기초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논문도 썼단 말이죠.
졸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계속 독촉받았어요. 논문 쓰는 것도 체계적인 작업이잖아요. 제가 책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는데,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면서 훈련이 됐어요. 제작 논문이기 때문에 내 작품으로 데이터 근거해서 이런 걸 했다 하면 되는 거였는데도 논문 쓰는 1년 동안 진짜 힘들었어요.
논문 주제는 뭐였나요?
<창조기>의 남자는 입술 얼굴이었고 여자는 다리가 손가락이었고 <파인드 미> 주인공은 머리에 뿌리가 달려 있는 애였잖아요. 제가 인간과 어떤 것을 결합시키는 특징이 있더라고요. 두 작품의 혼성(hybrid) 캐릭터에 대한 연구였어요.
똥두의 초기 캐릭터 끼라뽕이라고 인간 같은데 머리로 똥 나오고 이런 애니까 걔도 혼합일 수 있고. 인간형이 된 똥두는 3자 이마에 주걱턱인데, 일반적이지 않은 인체 표현을 좋아하나 봐요.
그림과 사진 이미지를 결합하기도 했죠.
10대에서부터 20~30대까지는 낯선 이미지 아니면 매력을 못 느꼈어요. 저한테는 공감되는 얘기 말고 ‘이 사람은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그런 낯선 얘기가 훨씬 더 좋은 거예요.
익숙한 거 말고 새로운 걸 보고 싶었다는 뜻인가요?
네. 근데 세상을 돌고 돌잖아요. 내가 놀랐던 얘기도 누군가한테는 익숙한 얘기일 수 있는데, 10대 20대 때는 다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일상적인 얘기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세계에 대한 얘기에만 치중했었죠. 서른 살에 결혼하고 나니까 안정에 대한 욕구가 치솟더라고요. 나이와 결혼, 애니메이션에서 만화로 넘어온 것이 복합되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한테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림책, 동화랑 비슷한 느낌이고 관념적이었어요. 만화는 앞뒤 이유를 다 보여줘야 되고 훨씬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스토리텔링 학교에서 시나리오를 배울 때 내 몸 안의 블랙홀이라는 아이디어에 꽂혀 있었어요. ‘내가 물건만 잡으면 없어져. 내 몸 안에 블랙홀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그 블랙홀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저는 ‘그냥 블랙홀이 생긴 건데, 그 과정을 왜 보여줘야 되지?’ 싶은 거죠. 장편과 단편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화 스토리는 더 디테일해야 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토리텔링 학교에서 특강을 하러 오신 분 중 한 분이, 스토리를 음식으로 비유해주신적이 있는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하고 비싼 음식보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된장찌개 같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훨씬 더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어려운 거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공감’이라는 영역에 관심이 생겼던 거 같아요.
『똥두』는 도전만화 때부터 수채화로 작업했나요?
그때는 디지털로 했어요. 웹툰 계약이 파기되고 수작업 흑백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양성 제작지원이 있었는데, 지원 조건이 출판사와 계약된 작품이어야 했어요. 그때는 ‘출판 계약을 한 작품을 왜 지원을 해줘야 되지?’ 생각했는데, 출판 계약을 해도 출판 작가들은 계약금 말고는 돈이 없거든요. 제작지원 내려고 출판사에 원고를 뿌리기 시작한 거예요. 근데 웹툰 업체보다 출판사 반응이 더 좋은 거예요. 비룡소뿐만 아니라 몇 군데 연락을 받았거든요.
그때 돌린 건 흑백이었나요?
네, 콘티인 줄 알았을 거예요.
계획은 없었는데, 하다 보니 출판을 하게 되었군요.
‘내가 출판이랑 더 잘 맞나? 그전에는 아예 생각을 못했어요.
디지털 웹툰으로 시작해서 흑백 수작업하다가 수채화로 바뀌었네요. 그때마다 이야기도 바뀌었나요?
조금씩 다 바뀌었죠. 웹툰 도전만화 했을 때는 <심슨 가족>처럼 가족시트콤을 하고 싶었어요. 똥두 얘기가 메인이긴 하지만 아빠 얘기도 있을 수도 있고 엄마 얘기도 있을 수 있고 오빠 얘기도 있을 수 있고. 웹툰은 분량 제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잖아요. 시트콤이면 작가가 지치지 않는 한 에피소드를 계속할 수 있잖아요. 그런 거를 지향했는데, 웹툰 계약 깨지고 흑백으로 그릴 때부터 거의 지금의 형태가 된 거죠.
다시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나를 사랑하는 법’ 이런 책들이 엄청 많이 깔렸어요. ‘현대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게 힘들구나’ 당시에 제 자신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나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과제인데?’ ‘두희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캐릭터에 집중하면서부터 조금씩 『똥두』가 만들어진 거 같아요.
대사가 아주 현실적이었어요. 부모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언제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어요.
웹툰 할 때는 애가 ‘씨발’하고 이랬거든요. 비룡소에서 책을 옮길 때 대사 수정을 했어요. 웹툰 할 때는 그런 게 상관이 없는데, 출판사에서는 “왜 애들 보는데 이런 게 들어가냐”는 부모님들 전화를 꽤 많이 받는대요. 사투리도 더 심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욕을 순화시키고 사투리도 연한 느낌이 됐어요.
애니메이션이 만화보다 순화된 것 같았어요.
급박하게 성우 구인을 했는데, 진짜 연락 많이 왔어요. 목소리는 마음에 들었는데, 경상도 출신이 아니니까 사투리가 조금 아쉽긴 했죠.
애니메이션은 한가해져서 만든 건가요? 아니면 TV 애니메이션의 로망을 실현해보고 싶었던 건가요?
복합된 거죠. 제가 똥두 이야기를 어린이 잡지에서 연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어요. 다른 사정으로 무산이 되긴 했지만, 세상이 나한테 원하는 거는 똥두를 계속하는 건가 싶은 거예요. 같이 사는 사람도 저한테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다.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어른스러운 얘기를 하고.
저도 어렸을 때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보고 좋아했으니까 막연하게 똥두를 캐릭터화시키고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캐릭터 상품도 상상을 하는데 실천한 적은 없어요. 두희가 캐릭터성도 있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웹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있어서 했죠.
<심슨 가족>은 지금도 다시 보고 있어요. 우리의 삶은 정말 복잡하고 미묘하고 막막한 구석이 많은데 심슨은 심각한 사건을 심플하게 해결하는 거예요. 그런 게 좋았던 거 같아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사는 거 별거 아니다,’ 그런 메시지를 받은 건가 싶어요. 비슷한 시기에 <빨간 머리 앤>도 <영심이>(1990)도 좋아했으니까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똥두』가 TV 시리즈 됐으면 좋겠다’ ‘누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만들어 보니까 오랜만에 재밌긴 했는데, 제가 혼자 다 만들었거든요. 만들고 나니까 남편이 공개하지 말라는 거예요. 득 보다 실이 더 클 거 같다고. ㅎㅎ 제가 작업하고 있으면 잘한다고 (엄지 척)해놓고 왜 그러냐니까 그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거 같아서 아무 말 안 한 거라고…(웃음) 솔직히 박지연 감독님께 다 맡기고 싶었는데, 바쁘셔서 제가 만화 그리면서 찔끔찔끔한 거죠.
똥두 애니메이션 보고 저도 <영심이>가 생각났는데, 12살 똥두는 육상을 한다니까 <달려라 하니>(1988) 생각나네요.
다 TV시리즈에 영향을 받은 사람. (웃음)
『똥두』랑 같이 하고 있다는 건
제목이 『그’냥이’다』인데, 고양이랑 같이 사는 인간들의 일상툰이에요. 광주콘텐츠진흥원에서 제작 지원을 받아서 마감이 7월이에요.
고양이를 키운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2018년부터 키웠으니까 5년 됐어요. 한 2~3년 차에는 더 데려오고 싶어서 기웃거리다가 꼴라나 잘 키우자 하고 접었는데, 친구 아는 사람이 고양이를 구조를 했다고 들일 생각 없냐는 거예요. 형제 고양이들은 죽고 두 마리 남았는데, 걔들이 너무 의지하고 있대. 생각해 보겠다고 한 다음부터 계속 미래를 상상하게 되는 거예요. 21일부터 세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게 될 것 같아요.
『그’냥이’다』 어느 정도 분량인가요?
지원 사업이 보통 웹툰 20화까지인데, 저는 27화까지 하겠다고 해서 냈어요. 한 회당 10페이지거든요.
그러면 원고만 270페이지인데 챕터별로 추가되는 게 30페이지 이내니까 종이책으로 약간 두꺼운 한 권이 될 것 같아요.
웹툰으로 보여주고 책으로 나오나요?
처음에 출판식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웹툰 편집으로 이중 작업을 하고 있어요. 출판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는 리듬감이랑 웹툰으로 쭈르륵 내려서 보는 리듬감이 차이가 많더라고요. 책으로는 마무리된 느낌이 나는데, 웹툰으로 편집하니까 끝난 건가 싶은 에피소드가 몇 개 있는 거예요. 출판으로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컷과 컷 사이의 느낌이 웹툰으로 나열했을 때는 뭔가 비어 있는 것 같아서 추가한 컷도 있고, 호흡이나 리듬감을 배우면서 하고 있어요.
평소에 메모나 일기를 쓰나요.
메모는 하죠. 메모 안 하고 놓치는 것도 많죠. 예전에는 조급한 마음으로 갈겨쓰고 ‘뭐라고 썼지?’ 이런 것도 있는데, 지금은 메모하는 걸 놓쳐도 ‘나한테 돌아올 얘기는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게 됐어요. 『똥두』 할 때 계획도 없고 혼돈의 도가니였는데 이제는 마무리를 해본 경험도 있고 언제 작업이 제일 잘 되는지 작업의 패턴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냥이’다』 를 하면서 삶을 더 알차게 보내게 됐나요?
고양이와 일상을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정신적인 치유를 받는 것 같아요. 일상툰은 치유의 효과가 아닌가? 일상을 되새김질하고 재구성하면서 ‘이 사건이 이런 얘기가 되는구나’ 그러면서 내 삶을 소중하게 바라보고 스스로를 응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로 픽션은 고통스러운데, 한 장 한 장 끝날 때마다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느낌이에요. 저는 작품 하나하나 끝내면서 항상 배우는 것 같아요.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저는 삶과 작품이 일치되면서 가는 스타일인 거예요.
인터뷰 2023년 5월 19일 @ 일산 서구 가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