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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 HAHM Heeyoon

흑백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된 식탁 위의 사물이 움직인다. 올록볼록한 유리 뚜껑이 데구루루 구르며 연필로 그린 빛과 그림자가 바뀐다. 관객은 움직이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소문의 진원지>(2022)에서 사건은 천천히 일어난다. 산봉우리가 솟아오르는 동안 집안 사물들은 몇 천 번쯤 자리를 옮겼겠지만 누군가의 주의를 끄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주목했다. 더없이 정적인 이미지로 희한한 긴장감을 연출하고 프레임마다 “여기를 보라” 소리쳤다. 고요한 외침에 이끌려 여전히 시간성을 파고 있는 함희윤 감독을 만났다.


Epicenter (2022)


어떻게 지내세요?

현재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작업 하고 있어요.


가제가 “움직이는 이야기”였죠. 제목이 정해졌나요?

제목은 “꿀은 녹고 있는 황금빛 유리”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중편이니까 서사가 있나요?

앞선 두 작업보다 제 기준에서는 꽤 서사가 뚜렷한 편입니다.


그러면 동물이나 인물이나 그런 캐릭터가 등장하나요?

캐릭터와 사람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최소한으로 등장시키려 해요.


그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은 뭔가요?

내레이션을 기본으로 깔고 책에 대해 설명하는 구조로 가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단조로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름 도박이거든요. 자신은 없어요. 책 형식이 해보고 싶어서 갖고 왔기 때문에, 열어봐야 알 것 같아요.


<소문의 진원지>를 하면서 이 작품 구상을 하셨는데, 사실 <소문의 진원지>도 <기억극장>을 하고서 시간성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하셨죠.

<기억극장> 마지막 장면 중에 비둘기가 천장 위를 걸어가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장면을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시간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문득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는 거에 대해서 의심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냥 암시받아온 어떤 일종의 계약과 약속 같은 거일 수도 있겠다.


<꿀은 녹고 있는 황금빛 유리> 콘셉트아트
<꿀은 녹고 있는 황금빛 유리> 콘셉트아트

<소문의 진원지>는 2021년 봄에 지원을 받아서 완성을 언제 한 거예요?

영화제 갔다 오느라고 6월부터 시작해서 제작 기간은 7개월. 그다음 해 1월에 완성했어요.


배경이 북한산국립공원이에요. 작업실이 지금 일산서구에 있는데, 여기서 북한산이 보이는 건 아니죠.

본가는 동구 쪽에 있는데 거기서는 북한산이 잘 보이거든요.


처음부터 북한산을 <소문의 진원지>의 소재로서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요.

네. 원래 북한산은 항상 봐왔던 곳이라 제게 큰 감흥은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색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 가끔씩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산이 자란다는 개념에 흥미가 생겼어요.


북한산은 이번 작품에만 등장하는 산인가 했는데, 스튜디오 미닝리스의 로고에도 있더라고요.

맞아요. 북한산이 좀 중요한 뭔가로 다가오는 느낌이에요. 일산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일산에서 서울 나갈 때 보면 북한산이 무조건 보인단 말이에요. 전철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 시야 안에 계속 보이는 존재였어요.


특별히 그 봉우리가 눈에 띄는 이유는 있나요?

그 산이 정면으로 제 방에서 딱 이만큼만 조그맣게 보여요. 계속 보다 보니 자연스레 눈에 띄었어요.


멀리 산이 보이는 바깥에서 우르르 진동이 울리면서 시작합니다. 지진을 넣기로 한 건 언제였어요?

처음 산이 자란다는 소재에서 시작했고, 자라려면 지진이 나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영제가 epicenter잖아요. “소문의 진원지”라는 제목은 처음부터 있었어요?

처음에 애니메이션과 대학원 들어와서 정기작 할 때부터 “소문의 진원지”라는 제목을 짓고 거기에 맞춰서 작업했어요.


한글 제목 짓고 영어 제목은 그냥 에피센터로

영어로 직역하면 너무 길고 설명적이더라고요.


화면에서 타이틀 보고 놀랐어요. i가 2개네 t가 2개네. 타이틀에도 진동을 표현하다니 굉장히 섬세하시구나.

제가 요구한 것은 아니고, 디자이너님이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해 주셨어요.

Epicenter (2022) poster
<소문의 진원지> 포스터

밀도가 높은 연필 소묘잖아요. ‘내 소묘 실력을 마음껏 뽐내보겠어’ 이런 건가요?

그림을 오래 그렸어요. 스스로 재미있어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다 보니 자연스레 밀도 높은 그림이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정물화는 집에 세팅을 해놓고 관찰하면서 작업을 하셨나요?

완전히는 못하고요. 부분적으로 여기 세팅하고 여기 세팅하고 합치는 형식으로 했어요. 그대로 찍어서 올리면 제가 보기엔 안 예쁘더라고요.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원근감이 너무 과하다고 해야 되나. 합성한 것이랑 카메라의 렌즈로 보는 거랑은 조금 다르거든요. 그래서 요소요소들을 그려서 합성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있어요.


구성은 촬영을 한 다음에 컴퓨터에서 편집하는 거예요 아니면 사진들을 보고 그리면서 배치하는 거예요.

사진 찍어서 그림 그릴 때 배치해요. 전체적인 구도 잡고 거기에 맞춰서 스티커 붙이는 것처럼.

<소문의 진원지>에서 비닐하우스 장면이 이질적이에요. 실재하는 공간인가요?

저희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인데 지나갈 때마다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문득 저기서는 어떤 대화들이 오갈까 상상하다가 작품 속에서 지진이 났으니까 그것과 관련한 주변 상황도 조금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이 공간을 오래 촬영을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닐하우스 안에서 나오는 남자의 움직임도 그렇고 쥐나 오토바이, 벌레가 화면 앞을 지나가는 타이밍이 실제 같이 자연스러웠어요.

실제 같다고 해주시니 기뻐요. 녹화한 것은 아닌데 타이밍의 경우 <소문의 진원지>를 제작하기 전에 느린 템포의 영화에 빠져 있어서 그런 것들을 많이 보다 보니 타이밍을 잡는 데 좀 더 수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 장면에 자를 뗄 때 포커스가 변하잖아요. 그것도 그냥 만들어 낸 거예요?

그렇게 하면 재밌더라고요.


제일 수수께끼 같고 의미심장한 장면이 그림 속 조각이 현실에 나타나는 거예요. 등장을 예비하듯 해가 ‘여기를 봐라’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어요.

그 장면은 어떤 연결 통로를 만들어준 거거든요. 앞장면과 뒷장면이 만나는 부분이에요.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전화를 걸자 이 장면에 있는 남자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고, 앞장면에서 떨어졌던 두 조형물의 이미지가 현실 세계로 넘어오는 식으로 환상과 현실의 세계가 중첩돼요. 미세한 움직임이 중요한 장면이라 연출에 더 신경 썼어요.


일부러 떨어뜨려서 소리도 내주잖아요.

맞아요.


휴지 말아놓은 것이 그림에 있던 꼬불꼬불한 조형이랑 비슷해요. 약간 재밌는 집착처럼 보였어요.

환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넘어온 사물을 비슷한 형태의 다른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나름의 암시를 주고 영화의 작은 구조에도 디테일을 추가하려고 했어요.

빛과 그림자만 묘사한 게 아니라 반사되는 이미지까지 표현하셨잖아요. 풍경도 마찬가지예요. 비닐하우스 장면도 모든 것이 물에 비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인가요?

제가 봤을 때는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한데요. 그렇게까지 밀도 높게 그린 이유는 움직임이 많이 없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멈춘 그림도 사람들이 오래 보잖아요. 볼 때마다 어떤 새로운 정보들을 발견을 해야 질리지 않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세심하게 그렸어요.


Memory Theater (2020)


<기억극장> 학부 졸업 작품으로 만드신 거라고 들었어요. 3학년 때 애니메이션을 처음 해보셨고요.

학부 전공이 판화였는데 뒤늦게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인터넷으로 독학했는데 처음 시도해 본 애니메이션이 움직임이 어설프긴 해도 움직이더라고요. 그때 재미를 느끼고 3학년 때 1분짜리로 한 편 만들어봤어요. 3분짜리도 습작으로 만들어보고. 그 후 1년 휴학하고 만든 게 <기억극장>이에요.


1분짜리랑 3분짜리로 뭘 만들었어요?

사람 얼굴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었어요. 그때도 연필소묘였어요.


프로그램은 뭐 쓰셨어요?

포토샵이랑 프리미어로 작업했어요.


판화과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졸업 작품을 내도 됐나요?

다채로운 작품이 용인되는 분위기였어요. 물론 판화를 하면 좋아해요.


판화 공부를 통해서 얻은 역량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일단 판화를 안 했으면 흑백으로 안 했을 가능성이 크고요. 판화를 하면 공을 200%를 들여도 80%의 확률로 실패하기 쉽거든요.(웃음) 약간의 실수 때문에 좌절하게 되는 프로세스를 4년 동안 겪다 보니까 이제는 좌절하는 일들이 적어졌달까. ‘그냥 다시 하면 되지’ 이런 마인드가 판화 하는 사람들한테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는 느낌 들어요.


판화도 여러 번 찍어서 색깔을 내기도 하는데, 기본은 흑백이라는 건가요?

디폴트 값이라고 해야 되나요. 색깔을 낼 수도 있지만 그냥 판화 하면 저는 흑백 그림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소문의 진원지>에 3H, 6H 연필이 나오더라고요. H는 필기용 아니에요?

B는 진하고 무른 거고 H는 연하고 단단하거든요. H는 종이 위에 눌리면서 쌓이는 느낌도 좋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데다 밀도를 탄탄하게 올리는 게 수월해서 자주 쓰고 있어요.


일반 작화지에 그리신 거예요?

원래는 일반 작화지를 썼는데요. 판화과 교수님이 중성지를 추천해 주셔서 요즘은 중성지를 쓰고 있어요.


중성지는 뭐가 달라요?

산화가 되면 종이가 노랗게 변하는데 중성지는 그게 안 생겨요.


특별히 더 두꺼운 종이를 쓰는 건 아니고요.

저는 작화지가 마음에 들어서 작화지랑 최대한 비슷한 중성지를 찾았어요. 공장에서 제단은 했는데, 타공은 안 된다 그래서.


페그바 구멍이 드러나는 작업은 또 못하시겠네요.

이제 못하죠.


<기억극장> 무대 장면에 타공 자국이 보여요. 작화지 전면 사이즈로 프레임을 잡았어요.

그때는 애니메이션의 화면 비율 개념이 전혀 없었고 타공자국이 재밌게 느껴져서 그대로 사용했어요.


얇은 선은 물론 배경을 채운 굵은 선도 있어요. 이때는 B로 하신 거예요?

배경은 거칠게 표현하려고 9B로 했고요. 무대에 올라오는 물고기들은 0.3mm 샤프랑 H를 썼어요.


기억이 죽고 부활하는 모습이 물고기의 눈으로 표현되잖아요. 하얘졌다가 까매졌다가. 무대에 내놓았는데 또 죽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을까요?

까먹었다가 생각났다가 왜곡돼서 잘못 기억하고 그런 것들을 죽고 사는 걸로 표현을 한 거예요.


또 수수께끼 같은 건 못이에요. 세 군데 나오죠.

생채기 같은 거를 표현을 하고 싶었어요. <기억극장>은 전반적으로 우리 신체에 이름이 없는 부분을 간지럽히는 느낌의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만든 거거든요. 못 같은 경우도 되게 작은데, 은근히 강렬하잖아요.


작업할 때 미리 다 짜놓고 하는 것 같지 않아요. 한 장면 한 장면 만들어보다가 생각나면 다른 장면 들어가고 이런 식이었나요.

네. 상당히 직관적으로 콘티 없이 작업했어요.


그림의 실력이 점점 좋아진 게 아니라 갑자기 점프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새로운 작업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뭘 하고 계셨어요?

보통은 책 보고 영화 보고 글도 쓰고. 사실 그림은 거의 안 그렸어요. 그래도 그때 그림을 그리는 자세가 좀 바뀌기는 했어요. 좀 더 정성스럽고 섬세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실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시는 거예요?

사실적인 이미지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상성이나 초현실적인 현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사적인 표현방식이 기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편에 대한 스케치 같은 게 있나요?

스케치는 없고요. 그냥 장편 애니메이션 최소 하나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억극장>의 비둘기 장면을 그리고 나서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수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 가능성이 가장 큰 장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문의 진원지> 콘셉트 아트
<소문의 진원지> 콘셉트 아트 "사각형 태양이 뜬 풍경"

<소문의 진원지> 제작 크레디트를 공유하는 프레이머스는 무슨 역할을 했나요?

프레이머스는 영화 찍는 모임이에요. 거기서 단편 영화 몇 편 찍었어요. 지금은 절친한 친구들이에요. 요즘은 다들 회사 다니느라고 영화 제작은 쉬고 있는데 제가 계속 크레디트에 집어넣고 있어요. 잊지 않으려고.


작업을 하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봐요? 중간에 피드백을 받습니까?

스태프들을 제외하고는 작품은 완성된 후에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편이에요.


아는 사람들이 프레이머스?

프레이머스 친구들이랑 가족들이랑 개인적으로 고마운 분들께 보여드리고요.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책 저자분들한테 멋대로 보낼 때도 있어요.


일면식도 없는데, 그냥 쓱 보내요? 이메일로?

네. “작가님의 책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 저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 사람인데 이런 작업을 하고 있고, 한번 봐주시면 기쁠 것 같다.” 이런 식으로요. 다음번엔 감독님한테도 보내드릴지 몰라요.


그때 우리는 두 번째 인터뷰를 해야죠.

 

인터뷰 2023년 4월 7일 @ 일산서구 대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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