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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KIM Sujin


김수진 감독의 <언포가튼 Unforgotten>(2021)은 2022년 12월 6일 대구에서 열린 SIGGRAPH Asia에서 한국 첫 상영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4명의 증언을 담은 3D 애니메이션은 깊은 바다와 황량한 사막, 인간 형상의 고목과 바위로 엄연한 역사와 책임의 무게를 감각하게 했다. 서양화과를 다니면서 첫 번째 영상 작업 <레지스탕스 Resistance>(2014)를 통해 예고 시절부터 우러르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깨부쉈다. 첫 애니메이션 <이카루스 Icarus’ Desire>(2013)도 독학으로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Arts) 석사 1년 과정에서 만든 <몰드 MOLD>(2018)에도 새처럼 날고자 하는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욕망을 인지하고 억압에 저항하는 기질이 역력한 필모그래피다. 초현실적 세계를 느리게 유영하던 <언포가튼>의 카메라는 관객을 경유해 작가에게 돌아왔다. 예술과 기술, 증언과 재현, 욕망과 사명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언포가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CalArts 실험 애니메이션 전공 2학년이던 2019년도부터 작품 구상에 들어갔었어요. 원래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가 이화여대 출신이어서 페미니즘 교육에 있어서 뿌리가 깊습니다. (웃음) 2015년도에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탑 다운 식의 밀실 한일위안부 합의를 했잖아요. 생존자분들과의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결정을 내렸을 때 국민 한 사람으로서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분노했었죠. 그리고 제가 유학 왔던 첫 해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 때의 한일위한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면서 화두가 됐었어요. 그때 다시 한번 의문이 드는 거예요. ‘왜 생존자의 목소리는 국가 간의 합의 과정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


이 작품 구상을 하면서 ‘위안부’ 관련 애니메이션, 영화, 특히나 다큐멘터리 등 존재하는 모든 영상 작품들은 거의 다 본 것 같아요. 제가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20대 초반부터 가졌던 고민 중에 하나가 ‘여성에게 가해진 신체적, 성적 폭력에 대한 예술의 고발은 왜 고통받는 여성의 몸을 전시, 재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여성의 몸에 대한 학대를 그대로 재현하는 기존의 예술형식들이 때로는 생존자들에 대한 또 다른 시각적 폭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뒤집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2019년도 초반에 작품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고 2020년도 5월에 완성을 목표로 제작을 하고 있었는데, 2020년도 3월 초쯤에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학교가 문을 닫았어요. 당시 졸업 작품을 하던 모든 학생들이 장비라든가 시설에 대한 접근을 잃어버리고 집에서 작업을 해야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어요. 많은 친구들이 졸업 작품을 원하는 만큼 완성을 못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저는 졸업 후에도 계속 <언포가튼>을 만들었고 결국 2021년 초에 제 스스로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도 원하는 작품이 될 때까지 <언포가튼>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ASIFA Hollywood Animation Educator’s Forum이라는 단체에서 작품 제작을 위한 장학금을 받았어서 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선택한 역사적 주제에 대한 무거운 책임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LAMENT (2020)

졸업 이후에 작품만 할 수 있었나요?

코로나 때문에 미국의 잡마켓 상황이 정말 안 좋았었는데, 저는 지금 생각해봐도 운이 되게 좋았었어요. 졸업한 선배의 소개로 LA 사립학교에서 티칭잡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제 필름들을 보고 굵직굵직한 커머셜 작업이 들어왔었어요. Epitah Records의 새로운 뮤직비디오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맡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말 실험적인 CG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Lament>를 만들었습니다. 또 Warner Music UK에서 연락이 와서 영국의 전설적인 뮤지션 그룹 MUSE의 Origin of Symmetry 리믹스 앨범의 표지디자인도 맡게 되었죠. 졸업 이후 학생 때보다 오히려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더 큰 창작 에너지와 아티스트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는데요, 그런 상황이 <언포가튼> 작품을 완성시키도록 큰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뮤직비디오는 <언포가튼> 스타일의 연장인 것 같은데,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것인가요?

저한테 연락을 준 클라이언트는 제가 2018년에 세상에 내놓은 <몰드>라는 실험적 댄스 애니메이션을 보고 연락을 주셨더라구요. 제 작품 속 다크한 에너지가 들어간 실험적인 뮤직비디오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었고 특정한 애니메이션 기술이나 스타일을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제 감각을 믿고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형식의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해 줬어요.


그럼 뮤직비디오 작업이 <언포가튼>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언포가튼>은 제 머릿속을 수년간 떠돌던 이미지와 군상들의 집합입니다. 오히려 <언포가튼> 제작 과정에서 경험한 예술적, 기술적 실험들이 상당한 규모의 커머셜 작업을 할 때 도움을 많이 준 것 같아요.


<몰드> 때만 해도 2D 드로잉을 하셨는데, <언포가튼>은 완전히 3D로 바꾸셨어요.

제 백그라운드가 페인팅이에요.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미술 교육을 받았었고, 자연스럽게 예고에서 공부하고 종착역으로 서양화과를 선택해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오랫동안 그림만 그렸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니까 계속 정지된 이미지만을 만드는 게 지겹더라고요. 뮤직비디오나 실험 영상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얀 슈반크마이예르의 <앨리스>(1988)를 봤어요. 당시에는 그런 작품을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요, 주변의 물건들을 조합해서 만든 이상야릇한 초현실적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저도 그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것은 게을리하고 조소과에 가서 퍼펫을 만들거나 목탄으로 애니메이션 만들기 같은 기존해 하지 않던 활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 학제 간의 경계를 허물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상태긴 했지만, 다학제적인 접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소수 학생들을 제외하고서는 그냥 페인팅만 하던 때였어요. 영상의 기본도 모르는 상태였고, 학교에서 필요한 기자재를 빌리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돌고 돌아 서양화과에 있던 화질이 아주 떨어지는 캠코더 딱 하나를 빌렸는데, 이런 식으로는 안되겠는 거에요. 당시에 꼭 만들고 싶은 실험 필름 작업이 있었는데, 욕심껏 만들려면 장비 때문에 돈이 필요하겠더라구요. 그래서 학기 중간에 학비를 빼서 청강하면서 작품을 만들었어요. 부모님도 모르는 조기 졸업자입니다. 그 정도로 영상으로 내가 원하는 장면을 캐치를 하겠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이화여대 중강당을 빌려 촬영을 했는데요, 그 결과물이 <레지스탕스>입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거 찍고서는 작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RESISTANCE (2014)

<레지스탕스>가 학부 졸업작품인가요?

제가 3학년 때 만들다 끝을 못 봐서 편집을 계속하다가 2013년도 말인가 2014년도에 끝냈던 작업이고, 졸업 작품은 <이카루스>라고 목탄 애니메이션과 회화를 같이 전시한 종합적인 설치작품이었습니다. 이카루스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레지스탕스> 때 이미 외국에서 작업한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검은 칠을 한 배우가 외국인처럼 보였거든요.

한국인이에요. 제 베프, 고등학교 동창.


마리아는 아시아인의 얼굴이 분명하긴 하지만 하얗고 주인공은 흑인으로 설정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흑인이라고 생각은 안 했고, 마이너리티라고 생각을 했어요. 주류와 그리고 비주류의 대치가 가장 옳은 말인 것 같아요.


영상 작업 이전의 작업들도 인권이나 페미니즘 주제로 작업하셨나요?

제가 페인팅만을 하던 시절에는 소위 일기장 작업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제가 당시에 어머니와 문제가 좀 있었었어요. 차녀로 태어났고 위에 오빠가 있었는데, 제 스스로를 성스러운 모자신화에서 소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였었고 예민했어요. 그래서 순수한 감정에 휘둘릴 수 있었고, 관계에서의 소외감과 분노가 작품을 만들 만큼의 에너지가 됐었어요.


한 학기 동안 휴학하면서 돈을 모아서 2012년도에 서유럽에 혼자 배낭여행을 갔었어요. 돌고 돌아 로마, 바티칸에 갔죠. 저는 피에타를 너무너무너무 좋아했었거든요. 예고에서 미술 교과서 보면서 ‘너무 멋있다. 꼭 한 번쯤은 진짜로 실제로 보고 싶다’ 했어요. 그런데 막상 바티칸에 도착해서 탄성에 젖어서 피에타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성모마리아와 예수를 바라보는데, 제 마음이 슬픈 거예요. 뭔가 되게 기분 나쁜 거예요. ‘왜 저기 내 자리가 없지?’ 피에타에는 숭고한 어머니와 영웅으로서의 아들을 위한 자리만 있고 누군가의 딸인 저를 위한 자리는 없는 거예요. 숭고하고 희생적인 어머니만을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역할로 보게 하는 사회적 도상이자 예술의 표본을 부수고, 저와 같이 소외된 자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상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 비뚤면서도 혁명적인 생각을 했었어요, 피에타를 보고 나오면서.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레지스탕스>입니다.


놀라운 게 그 작품을 만들고 나서 제가 치유가 됐어요. 저는 그 이후 예술의 치유능력을 믿습니다. 예술은 관객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치유할 수 있구나를 이 작품을 만들고 나서 진정으로 알게 되었어요. 재밌는 사실은 작품 속의 남성 토르소상이 우리 오빠예요. (웃음) 제가 오빠 상반신을 석고로 떴어요.


오빠가 협조적이셨나 봐요.

제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몰랐을 걸요?(웃음) 피에타를 부수는 작업을 하면서 예술적, 사회적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개인의 트라우마나 감정을 토로하는 일기장적인 작업보다는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을 하고 싶어졌어요.


ICARUS’ DESIRE (2013)

학부 졸업 작품 <이카로스>는 어떤 작업이었나요?

제가 시사문제에 좀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늘 자기 한계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요. 이카로스의 역동적인 몸짓을 통해 인간이 가진 본질로서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 결과물이 <이카로스>입니다.


<레지스탕스>는 실사 영화였고 <이카로스>가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로군요.

그쵸. 그전에 자그마한 실험들을 했었지만, 전시를 목적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든 것은 <이카로스>가 처음이었어요. 이화여대 서양화과 3학년 때 조덕현 교수님을 처음 만났었는데, <레지스탕스> 하고 있는 거 보여드렸을 때 교수님 좋은 작품이라는 거예요. 다른 친구들이 페인팅할 때 혼자 엇나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될 때가 가끔 있었는데, 스승님의 긍정적 반응이 너무 힘이 됐어요. 제가 영상작업하는 것에 많은 격려를 해주셨죠. 그래서 애니메이션 기법을 서양화과 졸업작품으로 내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교수님께서 제 졸업 작품인 <이카로스>에 가장 어울리는 공간을 혼자 고민을 하셔서 거의 잊히다시피했던 암실을 단독 졸업작품 설치 공간으로 내어주셨어요. 너무 감사했어요. 저도 지금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스승의 격려와 믿음은 학생의 성장에 말 못 할 큰 힘이 됩니다.


혼자 어떻게 애니메이션을 공부하셨어요?

그냥 했어요.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그려서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1초에 여러 장을 한 번에 보여주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면서요. 내가 하고 있는 회화의 연장선으로 여겨져서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정규 애니메이션 교육과정을 밟지 않았던 것이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미디엄을 확장하고 실험적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캔버스가 너무 비싸서 나무 패널에다가 젯소 칠을 몇 번 겹쳐한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렸었는데요, 어느 날 그 젯소 칠 된 패널 위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려봤어요. 그 자체로도 재밌었지만, 더 재미있었던 건 기존의 드로잉을 지우고 그 위에 또 다른 드로잉을 했을 때 보이는 이전 드로잉의 흔적이었어요. 시간의 흔적인 거죠. 그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드로잉을 사진으로 찍고, 지우고, 그 위에 다음 드로잉을 하고, 사진으로 찍고, 지우고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나서 찍힌 수십 장의 드로잉을 카메라로 넘겨보는데, 너무 재밌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연구하고 배웠어요, 혼자 놀면서.


유학을 결정한 된 이유는 뭔가요?

저는 대학공부가 잘 맞았어요. 글 쓰는 것도 좋고 크리틱 하는 것도 너무 좋고 작업하는 것도 좋고 진짜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어요. 근데 졸업할 때가 되니까 나가서 할 게 없는 거예요. 어떤 친구들은 교직을 준비를 했다던가 교생 실습을 나갔다던가 그랬었는데, 저는 정말 작업만 했었거든요. 당시 제가 차석으로 졸업을 해서 동 대학원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미디어 아트를 공부하려고 미디어 디자인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제가 생각한 것과 대학원 생활이 달랐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없었고 의미 없는 활동들에 시간을 허비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한 학기를 끝으로 대학원을 그만두고 유학을 결심했어요. 1년 치는 내가 모은다는 심정으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3년 동안 돈을 모았어요. 포트폴리오 준비나 공인인증 영어시험 등 모든 걸 학원 없이 저 혼자 했어요. 아이들 가르치랴 유학준비하랴 돌이켜보면 바쁘게 산 것 같은데, 인생에 있어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이었어요. 저는 아직도 학부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가지 못 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MOLD (2018)

CalArts로 간 게 2017년인가요?

네, 2017년도 9월.


첫 작품이 <몰드>인가요

네. 디지털 드로잉 작업입니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로토스코핑 기법을 쓴 건가요?

로토코스코핑의 실험적 적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웃음)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며 제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규격화를 강요받으며 살았는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시간이 지나자,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그 어떤 사회에서도 힘의 구조에 의한 사회적 규격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죠. 인간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억압하는, 인간보다도 더 강하고 오래 살아남는 사회적 프레임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제 친구 중에 무용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에게 원하는 동작을 설명하고 나름 해석해서 찍어 보내달라고 했죠. 그 친구는 제 또래의 여자였는데, 그 친구의 동작을 로토스코핑하는 동시에 전혀 다른 여러 몸의 형태로 변형시켰습니다. <몰드>를 보시면 한 가지 동작을 군무로 따라 하는 다양한 젠더, 나이, 인종의 인간 군상을 볼 수가 있죠. 사회적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움직이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창의적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보 리(Bo Li)와 <몰드>와 <언포가튼>을 사운드 작업하셨는데, 어떻게 만났나요?

칼아츠에서 만났습니다. 보는 당시 씨어터 학교에서 사운드 디자인 전공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였죠. 제 기숙사 친구를 통해서 운 좋게 알게 되었습니다. 보랑 저를 포함해서 겨울방학 동안 돌아가지 못한 가난한 유학생들끼리 모여 LA에 있는 라크마 미술관에 갔었는데요,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제가 1학년 필름 작품 <몰드>를 하던 중에 사운드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는데, 사운드와 뮤직의 경계를 없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 친구의 생각을 듣고 토론하면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죠. 아주 재능 있는 친구죠. 결과물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모든 작품들의 사운드 아트를 담당해주고 있어요. 보도 저도 유학생 출신입니다. 지난 수년간 미국에서의 고락을 함께 한 동지이자 연인으로, 며칠 전에 결혼해서 제 남편이 됐습니다.


BABY PARROT (2019)

Baby Parrot (2019)
Baby Parrot (2019)

<언포가튼> 전에 <아기 앵무새 Baby Parrot>라는 3D 애니메이션이 있어요. 졸업 후 업계 진출을 위한 포석이었나요?

CalArts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2D 애니메이션을 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CalArts에서 3D 애니메이션이 주류도 아니었고요. 1학년때 처음으로 수강신청을 하는데, 그냥 한번 3D 애니메이션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어요. 아무 이유 없이요. 아직도 첫 수업이 기억나요. 뭣도 모르고 신청한 그 수업은 중급 3D 모델링과 텍스쳐 수업이었는데, 저는 그 첫 수업만으로 3D와 깊은 사랑에 빠졌어요. 교수님이 직육면체였나 도넛이었나, 정말 별거 아닌 기본 3D 모델을 가지고 어떻게 2D 이미지를 이용해서 3D 물체에 입힐 수 있나를 리뷰 형식으로 간단하게 보여주셨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제 세계관이 확장되었어요. 아주 간단한 수업이었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어요. 그래서 이미 <몰드>를 만들기 전부터 3D 애니메이션 쪽으로 결국에는 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2학년 때 들어서서 어느 정도 기술적인 부분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여러 가지 짧은 실험 3D 애니메이션들을 만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CalArts의 마케팅 부서 디렉터가 저더러 크리스마스 기념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신나는 기회였어요. 처음으로 클라이언트를 통해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이었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3D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어요. 업계 진출을 염두에 두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물론 나는 이런 것도 만들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3D도 결국 예술적 선택이라는 거군요.

예, 저는 3D를 취업 시장을 노리고 시작한 게 아니에요. 말도 안 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 3D는 제가 배운 페인팅의 연장이에요. 둘 다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에서 저에게는 똑같아요.


UNFORGOTTEN (2021)


<언포가튼>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아카이브를 활용하셨는데, 네 분의 증언은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작업을 결정을 하고 나서 굉장히 힘들었었어요. 우선은 너무 무거운 주제잖아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질문했어요. 감독의 명성과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작품의 이야기로 이용되는 형국을 보지 못했던 게 아닌 터라, 제 작품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숙고했어요. 저는 존재하는 모든 증언을 듣고 읽는 것이 제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리서치 과정에서 우연히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E히스토리 온라인 아카이브를 알게 되었는데요, ‘위안부’ 생존자 할머님들이 남기신 수많은 증언과 고통의 시간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히 저장되어 있는 곳이에요. 존재하는 모든 증언을 몇 날 며칠을 들으면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를 하나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다른 형태로 듣는 것은 정말 정신적으로 고단한 일이에요.


처음에는 그분들에게 연민이 들었고 그분들을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쌍한 여인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그분들의 증언이 남아서 후손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들의 용기와 결단을 의미하는 것을요. 생존자 분들은 다시는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범세계적 목소리의 중추가 되어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더더욱 돌아가신 할머님들, 더 이상 과거의 기록을 들추지 않으면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잊혀진 분들의 목소리를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언포가튼>에 등장하는 네 분의 할머님들은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계시지만, 그분들의 독립적인 증언은 결국 작품 속에서 하나의 통일된 거대한 서사를 형성합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증언을 선정했어요. 이후 한국에 리서치 여행을 떠나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과 여성가족부에 연락하여 아카이브 사용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이미지의 작품은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저는 생존자 분들이 경험한 고통을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시각적 폭력을 재현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생존자를 무기력한 희생자 프레임에만 가두기 쉽고, 또 생존자 분들에게는 또 다른 무의식적 시각적, 정신적 폭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떻게 그분들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방문하여 답을 찾았죠.


한국에서 리서치 여행 중에 방문한 나눔의 집 갤러리에 할머님들이 그리신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그림들이 굉장히 시적이에요. 그분들은 단 한 번도 폭력을 폭력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영감을 받아 시적이고 암시적이지만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언포가튼> 속 시적 영상과 할머님들의 분절된 증언들이 만나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준다고 생각합니다. <언포가튼>의 영상도 목소리도 어느 것 하나 혼자서는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완벽하지 않지만, 분명치 않은 요소들이 만나 섞이어 결과적으로는 뚜렷한 서사와 울림을 전달한다고 믿습니다.


할머니들의 그림 말고 특별히 레퍼런스를 삼은 이미지는 없나요.

전혀 (이미지) 리서치 작업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을 만들 때는 각각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돌이켜보는 저는 이 작품을 만들기에 상당히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실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기 전부터 많은 드로잉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제 사운드 아티스트인 보에게 이 작품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몇 가지 실험적인 사운드 트랙들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는데요, 그 사운드들이 이미지를 연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레퍼런스는 나눔의 집 박물관에 있던 실제 위안소 방을 재현한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붉게 보이는 조그만 방 안에 놓인 볼품없는 침대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세숫대야 하나를 보며, 그 공간이 그 속에서 살았던 ‘위안부’ 여성들을 대신에 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방에 영감을 받아 첫 장면을 만들었는데요, <언포가튼>을 보면 부서지는 붉은 방 장면이 바로 그 장면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했을 때 텍스처가 모델링에 입혀지는 걸 보고 세계가 넓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셨다고 했는데, 지금의 AI 기술을 보면서 작업에 적용할 생각을 해 보셨나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든 생각은 현재 AI 기술은 Timeless 한 작품을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시간이 많이 지나도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한 장 한 장 그려낸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며 내 영혼 어딘가가 건드려지는 느낌을 받는 건 그 작품에 쓰인 기법과 기술과는 별개로 그 작품 안에 존재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아티스트의 지문과 같은 독창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작품을 만들기에 저에게 AI 기술은 매년 새로이 출시되는 아이폰에 의해 구형 아이폰이 관심을 잃는 것과 같은 수준에 아직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은 어떤 겁니까?

내년 초에 발표될 뮤직 앨범 아트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태국의 왕정과 부패한 군사독재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음악들을 위해 앨범 아트를 디렉팅 했습니다.


제 개인 필름 작업을 통해서는 한국 전쟁이 이후 남겨져 지금 세대까지 이어져오는 사회적 상흔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시너지 효과를 위해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요, 둘 다 내년 말까지 마무리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능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둘 다 3D로 작업하시는 건가요?

여러모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결국 안정기에 접어들어야 보이겠죠. <언포가튼>도 초반에는 2D와 3D가 섞인 애니메이션으로 계획했었어요. 그러다가 완전히 3D로 갔구요. 재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 교수로 임용되고 나서 1년 반이 흘렀는데요, 처음 1년간 창작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정체성과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쉽지가 않더군요.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시간이 생기기 시작을 하니까 스스로 푸시를 하면서 기술적으로 작지만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연관이 되어도 두 작품은 독립적인 작품인 거죠?

완전히 독립적인데, 역사적 문제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과거를 현재와 연관시킨다는 맥락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작품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게 <언포가튼> 덕분이에요. 제 개인적인 관심과 책임감 때문에 작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여러 군데에서 좋은 평가를 듣게 될지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2021년도 스튜던트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애니메이션 부문 최고상을 받은 건 그중에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아카데미가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로서 작품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제가 희망했던 것처럼 범 인류적인 메시지 측면에서 작품을 평가해준 것이죠. 앞으로도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Zoom 인터뷰 2022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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