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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SONG Yungsung


빨강과 초록, 노랑 그리고 파랑, 선명한 색감으로 20세기 초 현대미술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창조적 진화>(2019)와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으로 환희와 절망에 겪는 단테의 이야기 <우리들의 2>(2021)는 선뜻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다. 켄트지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했던 전작과 달리 디지털 작업을 하며 면에서 선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표정이 드러나는 캐릭터도 등장했다. 학부시절 로베르 들로네의 회화 작품에서 움직임을 감지하고 졸업작품으로 칸딘스키의 ‘구성VIII’(1923)를 주제로 영상 논문을 제작한 송영성 감독은 대학원 진학 후 색채와 형태의 운동성을 탐구했다. <창조적 진화>는 성실한 공부를 기반으로 예측불가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방식의 출발점이다. 2022년 11월, 마티스의 동명 작품을 모티브로 <생의 기쁨 삶의 기쁨>을 작업 중인 그를 만났다.


PART BLUE (2010)


학부 때 디자인 전공해서 디자인 이론 연구자가 되려고 하셨다죠.

원래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서 대학 진학을 할 때 일본도 가보고 알아봤어요. 그때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다 돌아다녀보고 책도 받아서 읽어봤어요. 무사시노미술대학 시각전달디자인학과가 제일 핫 했고 학과 안에서도 분야가 다양해서 영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개체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진학했어요.


유럽 타이포그래피나 근대 미술을 토대로 커리큘럼이 짜여있는 학교예요. 그 영향을 받아서 쭉 디자인 공부를 했어요. 학부 때 애니메이션 쪽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각보다 적었어요. 그래서 전문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졸업할 때쯤 동경예술대학 대학원에 애니메이션 전공이 생겼어요. (디자인 이론 연구를 계속할지 애니메이션을 할지) 흔들리다가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나요.

대학교 때는 자신의 아이디어나 어떤 문제에 대한 제시법을 시각화한다는 의미에서의 실험적인 제작을 주로 했어요. 제가 있던 학과는 활발하게 작품 활동하고 싶어 하는 애들과 주로 연구를 하고 싶은 애들로 갈라져 있는데, 저는 연구 쪽 가고 싶어 했던 쪽이어서 하나의 완성 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되게 강했어요. <파트 블루>라는 작품은 제가 대학교 때 배웠던 교육을 토대로 만들었던 거예요. 이때는 프레임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어서 엄청 큰 종이를 사서 크레파스로 계속 그렸어요.


작화를 옅은 푸른색 종이에 하셨어요.

대학교 때 색채론이랑 조형론을 공부했을 때 가장 어둠에 가까운 색깔이 무슨 색인가 가장 밝은 색이 무슨 색인가 이런 거를 물감의 섞어가면서 해본다든지 디지털로 색깔을 배열했었거든요. 파란색을 더 파랗게 표현하려고 파란색 종이에다가 그렸던 것 같아요.


완성된 영상의 배경은 까맣게 만드셨잖아요.

파란색을 하얀 종이에다 칠해보고 검은 종이에다가 칠해 봤는데, 하얀 종이에 하면 하얀 틈이 보이고 짙은 파란 느낌이 안 났어요. 검은 종이다 하면 편집할 때 잘 안 돼서 마지막으로 파란 종이로 했어요. 노란색 표현할 때는 하얀 종이로 바꿔서 칠했고요.


채색은 색연필로 하신 거예요?

수채 크레파스라는 게 있어요. 크레파스를 칠한 다음에 물을 칠하거든요 그러면 수채화처럼 색깔이 퍼져나가요.


외곽선이 디지털처럼 딱 떨어지지 않으니까 합성할 때 힘드셨겠네요.

그래서 작품 보면 되게 어설퍼요. 대학원 들어가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줄 알았는데, 제가 들어간 학과는 학교가 교육을 한다기보다는 프로덕션으로서 작가가 작품 제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곳이었어요. 제 주위는 전부 학부 때부터 작품 많이 만들고 상도 많이 받고 장래가 촉망되는 애들이었고 거의 저만 경험이 없었어요. 저는 한 두 명 뽑는 실험적인 거 하는 애들로 뽑힌 것 같아요. 스스로 다 알아보고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부터 추상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었어요?

요즘은 제가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잖아요. 완전히 추상계열의 작품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토리라인이 있고 캐릭터가 있는 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실험적인 작업 하는 작가들에 대한 동경이 되게 강했었어요. 그때 일본에서는 미디어 아트가 유행하고 많이 퍼져나가는 시기였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파트 블루>를 작업하던 책상 위 모니터 바탕화면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의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homage to bleriot’ 예요.

대학교 3학년 때 이 그림을 하나하나 다 쪼개서 몇십 장의 레이어를 만들어서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어요. 그때 공부를 했던 게 있었고 워낙 좋아해서 다시 한번 더.


로베르 들로네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어요?

그 당시는 로베르 들로네뿐만 아니라 칸딘스키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특히 로베르 들로네는 자기가 살았더던 시대를 긍정하면서 아름답고 밝은 색깔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부인인 소니아 들로네와 생각을 공유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던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로베로 들로네는 책으로 아니면 전시로 보셨나요?

책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학교는 미술 도서관이어서 일반 관람실이 있고 설마 있을 리가 싶은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데가 있어요. 신청을 하면 직원이 책을 꺼내다 주고 볼 수 있는 데가 있는데, 제가 도서관을 좋아해서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회화 작품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아마도 피카소 큐비즘 관련된 화집에서 같이 나와 있던 것 같아요.


형태와 색채의 애니메이션 (2009)

디자인과에서 추상 미술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희 디자인 학과가 3학년 때는 아무 과제도 안 줘요. 근데 전시는 정해져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리서치를 하고 선생님이랑 상담하고 만들어 가야 하는 거예요. 그때 계속 회화 작품을 쭉 찾아보다가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를 보고 감명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처음 그 사람 그림을 접했을 때 무엇을 표현하였는지 전혀 의미를 몰랐는데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영상적인 운동감과 리듬감이 있는 그림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또 비슷한 장르의 화가를 찾다 보니 칸딘스키의 그림을 알게 되었고 크게 감명을 받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이유를 모르잖아요.


찾다 보니까 이쪽 분야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한 것을 책이나 논문으로 낸다든가 언어화를 한 게 많더라고요 그거를 공부하면서 점점 조형론이나 색채론 쪽으로 공부가 깊어졌어요. 회화지만 제가 처음에 봤을 때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게 너무 신기했으니까 실제로 움직이게 표현을 할 수 있지 않겠나 해서 실험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흐름인 것 같아요. 졸업 작품은 칸딘스키의 그림 '구성 Ⅷ'을 CG로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었거든요. 그 작품 하나를 포트폴리오로 해서 동경예대대학원에 합격했어요.


CREATIVE REVOLUTION (2019)


<파트 블루>와 <창조적 진화>의 로베르 들로네는 어떻게 다른가요?

<창조적 진화>를 만들 때는 제가 한국에 와 있었어요. 대학원을 끝내고 와서 병역을 끝낸 다음에 어떻게 해야지 이런 시기여서 기획서를 계속 만들고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뭘 해왔나 메모를 해보니까 애니메이션을 하게 된 원점이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또 책을 찾고 연구를 하다가 보니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가 되게 혼란스러웠던 시대라더라고요. 에펠탑이 만들어지고 철도가 연결이 돼서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이 파리로 모여들고 비행기도 만들어지고, 1차 세계대전 터지기 전에 사람들이 이제 지구가 망하는 거 아니냐 이런 분위기가 엄청 강했다고 해요. 테크놀로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지만 그에 비해 들로네는 비행기나 자동차, 기계 문명에 대해서 로맨스를 느끼고 좋은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부분에 되게 끌렸던 것 같아요. 저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시기여서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베르그송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요.

로베르 들로네의 색채가 화려한데, 규칙이 있어 보이길래 이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한 건가 알아본 거죠. 처음에는 무턱대고 그림 찾아보고 당시 사진도 찾아보고 주위에 어떤 화가가 있었나 공부를 했어요. 슈브뢸(Chevreul, Michel Eugène 1786-1889)의 색채이론이라는 게 있는데, 보색 대비를 최초로 이론화시킨 프랑스 색채 학자예요. 프랑스 인상파로 들어오면서 보색 대비 색을 많이 쓰게 됐잖아요. 로베르 들로네가 이 이론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색채론에도 시뮬타네어스 simultaneous라는 말이 있잖아요. 베르그송(Bergson, Henri Louis 1859~1941)이라는 학자가 동시성에 대한 책을 냈다고 나와서 베르그송이 누군지도 알아봤어요. 들로네가 왜 이렇게 그렸나 화집 같은 걸 보면서 글로 정리하다가 보면 베르그송의 이름이 계속 나와요. 베르그송은 무슨 이론을 했나 책 읽고 정리를 하다가 피카소나 그 당시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던 것도 알게 됐어요.


저는 작품을 만들 때 이론화를 먼저 한 다음에, 그 이론을 토대로 해서 그림을 그려요. 그래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이론을 갖고 오려고 했어요. 원래 제목은 ‘창조적 진화’가 아니라 ‘블레리오에 경의’였어요.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게 처음 테마였어요. 유럽에서는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사람이 블레리오예요. 직접 전투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세계대전 때 대량 생산된 기계인데, 들로네가 이거를 만든 사람을 찬양했다고 해서 그 제목으로 작업을 했죠. 근데, 스토리보드에서 진행이 더 이상 안 되었어요. ‘왜 진행이 안 되나, 내가 어떤 자세로서 임해야 되나’ 다시 생각했을 때 창조적 진화라는 말 그 자체가 애니메이션으로서 내가 하려는 게 아닌가 했어요. 그걸 제목으로 갖고 옴으로써 창조적 진화라는 말이 계속 제 머릿속으로 들어오잖아요. 작품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서 그 제목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제목을 바꾸면서 내용에 변화가 있었나요?

원래 스토리보드 마지막은 비행기가 만들어지고 그 자체가 로베르 들로네의 추상 회화로 변해요. 그러면서 비행기가 늘어나고 전쟁이 시작되면서 어둠으로 끝나는, 모든 게 다 파괴되고 망하는 쪽으로 스토리 보드를 짰는데, 그 제목을 갖고 오게 됨으로써 이게 이제 저한테 와닿지 않게 변화가 된 거예요.


이 당시에 제가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 위한 작품으로서 준비하면서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과 창조적 진화 이론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면 그럴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박사과정은 결국 떨어졌어요. 그때 생에 처음으로 작품으로서 결과를 안 내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어떤 사람이고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누구를 향해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니 뒷부분이 다 바뀌게 된 거죠. 다시 스토리를 짠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는 그냥 계속 만들었어요. 작화가 진행되니까 그다음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해서 그대로 바로 작화랑 색채 작업을 동시에 해서 끝맺은 거예요.


현실에서는 좌절의 경험을 했는데 작품은 반대로 밝게 끝났잖아요.

처음에 성모 마리아한테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끝내려고 그랬는데, 엄마 품에 안긴 채 끝나면 창조적 진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혼자서 서는 모습이 저는 자립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당시에 제가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거랑도 겹치는 것 같아요.



스토리보드도 세 가지 버전으로 진화되었죠.

그렇게까지 자주 만들 필요도 없는데, 왜 이렇게 스토리보드를 열심히 만들었나 생각해보니 작화 작업 들어가는 게 두려웠던 거예요. 질질 끌고 있었던 거죠. 본 작업에 들어가는 걸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기법을 선택하셨나요?

제가 애니메이션 학과 들어왔을 때 야마무라 코지 선생님이 <프란츠 카프카의 시골의사>(2007) 만들고 세계에서 여러 상을 받으면서 완전 스타 같은 존재였어요. 그 시기에 동경예술대학에 애니메이션 전공이 생기고 들어온 애들이 다 그 선생님이 좋아서 왔더라고요. 그러니까 다 핸드 드로잉인 거예요. 야마무라 선생님이 보여주는 참고 작품들도 이 이상이면 이상이지 이것보다 손이 덜 들어가는 작품들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당연했던 것 같아요.


단순한 드로잉도 아니고 유화 느낌이잖아요. <파트 블루>는 수채 크레파스였고

두 번째 <큐큐큐>라는 작품은 오일 파스텔을 썼어요. 저는 작품을 만들 때 세계를 면으로서 표현할 건지 선으로 표현할 건지 항상 고민을 하거든요. <창조적 진화>도 처음에는 거의 면으로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리다 보니까 점점 셀 애니메이션 같은 윤곽선을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추상적인 그림에서 구상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더니 윤곽선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QQQ (2012)


작품마다 재료를 테스트하고 선택하는 거예요?

<큐큐큐> 하고 나서 손목이 너무 아팠어요. <창조적 진화>는 어마어마한 양이어서 이대로는 손목을 평생 못 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아크릴로 하기로 했어요. 물감이 덜 아파서.


<파트 블루>할 때 수채 크레파스는 그렇게까지 손에 부담이 없었어요?

엄청나게 부담이 있었어요.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오일 파스텔로 바꿔본 거였나요.

오일 파스텔은 유화 느낌을 표현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큐큐큐>는 어떻게 기획했나요?

<파트 블루>는 전체를 보는 시점인데, 그 안에도 개인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개인과 집단을 표현하고 싶어서 <큐큐큐>를 만들었어요. 학교에서 정말 평가가 안 좋았어요. 강평할 때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코멘트도 못 받고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영화제에 출품할 때도 선택받지 못했었죠. 아픔이 큰 작품이에요.


<큐큐큐>는 자유 연상처럼 작업을 하셨어요?

<파트 블루>라는 작품이 칸딘스키의 조형론에 필립 글래스의 음악적 어프로치를 채용해서 제 나름대로의 “리듬론”을 구축해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로사스 Rosas라는 현대무용 팀의 <Fase> 라는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 음악을 신체 표현으로 구현한 영상 작품이 있어요. 그 작품을 토대로, <파트 블루>에 신체성을 부여하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이 생겨 났고, 신체성에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성까지 테마가 확장되었어요. 처음엔 세포 같은 단순 생명체가 변형을 거듭하면서 인간적 신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표현하였고, 그 수많은 생명체 중 이질적인 하나의 존재가 있고 그 존재는 집단과 어떤 유기적인 관계성을 갖고 갈까를 영화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반응이 안 좋으면 작업 동기도 떨어지고 힘들었겠는데요.

그때 저를 독려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어요. 중간에 퇴임을 하셨지만. 그리고 동기 친구들은 제 작업을 재미있게 생각해주고 호기심 있게 봐주었어요. 그게 뒷받침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되돌아 보면 <창조적 진화>와 <우리들의 2>의 밑바탕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애정이 가요.


MOONLIGHT GRAVITY (2015)


<문라이트 그래비티>는 대학원 졸업하시고 한국에서 만들었어요.

병역 끝나고 나서 ‘뭔가 만들어야 되지 않나’ 초조한 생각이 있었어요. 스케치해왔던 걸 토대로 만들어 봤어요. 음악도 제가 만들었고요. 그때 혼자 해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를 뼈저리게 느꼈어요. 대학원에 나와서 혼자 해도 어떻게 될 줄 알았는데, 배급도 그렇고 제작을 할 때 내가 이런 걸 하고 싶다 얘기할 말 상대도 없어서는 안 되고 음악을 만들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혼자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나요, 결과가 마음에 차지 않았나요.

간단히 말해서 작품이 좋아지지 않았어요. 이 작품이 어디서 보이는 작품이고 누가 보는 거다 이런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학생 때는 상관이 없었어요. 학교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보이는 풍경들이 확 달라지는구나. 이런 식으로 작품 하나 더 만들고 또 만들어봤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겠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영화제 출품이나 제작 지원을 시야에 두고 했던 게 <창조적 진화>예요.


<문라이트 그래비티>는 뒷산에서 베어진 나무들을 보고 시작하셨다고 했어요.

이때 제가 공익근무를 아동센터에서 했었어요. 애들이랑 2년 동안 계속 지내니까 사람이 많이 바뀌더라고요. 처음에 너무 싫었는데, 걔네들이랑 친해진 다음부터 작품을 만들면 애들한테 뭘 보여줘야 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창조적 진화>도 이론적으로 철저하게 그림도 더 디테일하게 그릴 수도 있었는데, 이런 비주얼이 나온 것은 그 영향이 커요.


아이들 친화적으로 되었나요?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갔을 때도 느낀 건데, 어떤 사람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무지하게 많잖아요.

표현적으로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이 떠오르니까 ‘안 돼 좀 모자라 보이더라도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식으로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가는?

<문라이트 그래비티>를 만들 때 그랬던 것 같고 <창조적 진화>는 파괴되고 멸망하는 표현이 많이 나왔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문라이트 그래비티>에 달빛 정령 같은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데, 형태가 <창조적 진화>의 작은 비행체들과 유사해요.

전 처음 알았는데… (웃음) <문라이트 그래비티>는 일하면서 틈틈이 스토리보드를 그렸어요. 이 부분 만들 때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스토리보드를 보여줬는데,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창조적 진화>는 다시 일본에서 만들었고요.

대학원 일을 도와주면서 요코하마에 살다가 가마쿠라로 이사를 갔었어요. 그 후에 대학원 때 아르바이트했던 일본 회화를 만드는 아틀리에가 카마쿠라로 이사를 와서 거기서 일하면서 지냈었어요. 그러다 일본 문화청 제작 지원이 결정이 돼서 작품을 만들고 지원받은 작가들끼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상영회를 했어요. 일주일 이상 유료 상영회를 하지 않으면 지원금이 안 나오는 조건이 있었어요. 프로듀서인 오모다카 사야카 씨가 상영 활동 지원을 받았었어요. 그 돈과 그분의 인맥으로 어떤 각본가 분이 운영하시는 영화관과 교토의 장난감 박물관을 저렴하게 빌려서 상영을 하였어요.


순회 상영은 ‘애니메이션 팔레트’라는 이름으로 매년 하는 거예요?

매년 할 생각이었겠죠. 그런데 저희 때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지원이 없어진 건가요?

지원은 계속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졸업생들끼리 모여서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같이 회사도 만들고 활발하게 하시는데, 일본에서는 모여서 하는 문화가 잘 없는 것도 있고, 시대가 바뀐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입학할 때는 학생들이 작가 지망생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활동에 관심이 있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케이스보다는 취직에 좀 더 중심을 두는 애들이 많아졌어요.


OUR 2 (2021)


<우리들의 2>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창조적 진화> 이후로 작품을 당분간 안 만들 생각이었어요. 구상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니 과제가 많이 보여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부터 다시 시작을 하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애니메이터로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고민하다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차곡차곡 배우려고 말단으로 들어갔어요.


서예 활동을 하면서 회화와 조각 작품을 만드시는 “시슈”라는 작가분의 팀원으로 들어갔는데, 밑그림 제작 팀에서 그분의 아이디어를 포토샵 등을 사용해서 시각화하고 구체화 하면 하면 회화 제작 스태프들이 그걸 토대로 병풍이나 판에다가 그림을 그려요. 저는 두 개 다 경험을 해보고 마지막에는 회화 제작 스태프로 들어갔죠.


코로나 영향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서 팀이 해체됐어요. 저는 계속 남아서 일을 도와드리고 있었는데, 야마무라 선생님이 졸업생들한테 이탈리아 라벤나 나이트메어 페스티벌의 일본 이탈리아 컬래버레이션 기획에 참가할 사람 있냐고 하셨어요. 단테 사후 700주년 기획이다. 제작비는 없는데 작곡가가 붙는다. 거기에 있는 음악대학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어준다. 해서 “그때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아틀리에 다니면서 작품을 만들다가 한국에 와서 완성을 했어요.


아틀리에 일과 병행하는 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가능했나요?

<우리들의 2>는 100% 디지털로 해서 작업비는 인건비(니까 감수했고) 생활비는 일 하는 거로 문제는 없었는데, 회사 일과 같이 병행하기에는 조금 벅차서 나중에 일 횟수를 줄여달라고 해서 남은 시간에 제작을 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게 되니까 관둬야겠다 싶었어요. 그 당시 몸 상태도 너무너무 좋고 계속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하고 있었어요. 근데 아틀리에는 회화 제작팀을 해산하니까 그림 그릴 기회도 없고 사무와 작품 관리와 전시 관련 일만 하니까 이게 아닌데 싶고. 나는 지금 창작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이걸 쏟아낼 데가 없는 거예요.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걸 놓치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애초에 컬래버레이션을 조금 해보지 않겠냐 하는 기획이었는데, 저한테는 되게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일 그만두고 일본에서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왔죠.


참여 결정하고 제작했던 기간이 어느 정도인가요?

2021년 봄에 구상 작업을 2개월 하고 작화는 4개월 반 정도. 10월까지 내야 돼서 10월에 한국에 와서 10월 말까지 계속했어요.


일본에서 거의 다 만들었겠네요.

많이 안 돼 있었어요. (웃음) 기적 같은데, 열심히 하니까 다 만들어지더라고요. 영화제 내고 나서 꼬박 2주 동안 다시 작업해서 영화제 낸 거랑 퀄리티 차이가 있어요.



<창조적 진화>와 같은 분이 음악을 맡으셨잖아요. <큐큐큐>때 같이 해보고 괜찮아서 계속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아는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어서?

둘 다인데, <큐큐큐>는 작곡가 두 분한테 맡겼거든요. 전반부를 사토 아야코라는 분한테 맡기고 후반부는 다른 분한테 맡겼어요. 대학원 때는 동경예술대학에서 작곡 공부한 사람들과 컬래버레이션하는 기획이 있어서 작곡을 그 학과 사람들한테 부탁을 할 수 있어요. 그때 처음 알게 됐어요.


사토 아야코 씨는 자연에 있는 소리를 녹음한 다음에 디지털 상에서 다 쪼개고 가공을 해서 음악을 만들어요. 그 어프로치가 제가 애니메이션 하는 거랑 닮아서 좋았어요. 그리고 실험적이고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이 사람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줄지, 미지의 세계가 오히려 더 재미가 있어서 그분한테 부탁했어요.


라벤나 영화제 측에서 유명한 현대 작곡가분 음악을 마음대로 편집해서 써도 된다고 해서 사토 아야코 씨에게 그 음원들을 사용해서 만들게 했는데, 오히려 방향성에 혼돈이 생겨서 <창조적 진화>에서 같이 했던 아카이히루메씨도 참여시키고 그분의 목소리를 주역으로 하는 사운드 설계로 재정비 하니깐 음악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의 2>라는 제목이 낯설어요.

제가 또 다른 신작 제목으로 쓰려던 건데, 그 신작 아이디어랑 단테 신곡이랑 분위기가 비슷해서 이걸 그 신작으로서 만들기로 했어요. 그래도 '우리들의 2'라는 제목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우리들의 2'가 아니라 '2'라는 제목이었어요.


사운드 작업의 진행이 오랫동안 정체 되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저는 디렉터로서 어떻게 해야 이분이 하고 싶은 기분이 생길까 고민을 하잖아요. 그래서 목소리 하는 분이랑 셋이서 얘기를 하면서 “이거는 우리가 코로나로 시간을 지내면서 느꼈었던 감정이나 감각들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사토 아야코 씨는 코로나 때 어떻게 지내냐, 아카이히루메 씨는 코로나 때 어떻게 지내냐”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지금 한 얘기나 감정들을 담아두면서 음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부탁했거든요.


“여기 나오는 이 둘은 그냥 캐릭터가 아니다. 우리들이 그 두 명의 존재다.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인데, 이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제목은 ‘우리들의 2’다”라고 얘기를 했더니 뭔가 와닿았나 봐요. 그 후로는 사토 아야코 씨는 항상 “이건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면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흐름에서 ‘우리들의 2’라는 말을 갖고 온 것도 있어요. 작곡가를 설득해서 모티베이션을 끌어올리려고 우리들이라는 말을 붙여서 그분한테 준 거예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이에요.

저도 얼떨떨할 정도로 지금도 ‘이게 내가 만든 거야’ 하면서 보고 있거든요.



스타일 변화가 가장 눈에 띕니다. 디지털로 작업했기 때문일까요?

제가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취직을 하고 싶어서 연습할 겸 라인 드로잉 애니메이션 클립을 계속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새로운 애니메이션 표현 기법이 개발된 거예요. 사토 아야코 씨가 너무 좋아해서 이걸 토대로 음악을 만들어서 발표까지 했었거든요. 이분이 계속 저랑 컬래버레이션을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단테 기획을 가져갈 때 이런 스타일이 확립되었어요. 제가 일했던 일본 아틀리에 화풍의 영향도 있어요. 불 같은 거랑 격렬한 표현을 많이 하시거든요. 그때 계속 공부했던 일본 미술의 영향도 있고요.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 같은 50년대 일본 만화가 떠올랐어요.

데즈카 오사무 같다는 말 진짜 많이 들었어요. 제가 참고하는 그림을 모아서 도표를 만들거든요. 데즈카 오사무는 불 표현이라든가 태양 표현 같은 게 굉장하더라고요. 베아트리체라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데즈카 오사무의 여성 이미지는 거부감이 세서 채택은 안 했는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안으로 들어온 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들의 2>는 단테의 『신생』과 『신곡』을 합쳐서 작업했어요. 첫 번째 파트는 『신생』이고 두 번째, 세 번째 파트는 『신곡』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일단 원작을 철저하게 공부했어요. 예를 들면 지옥이라는 파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곡』을 토대로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갖고 와서 맞는 걸 찾아서 끼워 맞춘 거예요. 지옥, 연옥, 천국. 그래프도 만들고 표도 만들고 별짓을 다 했어요.


기획할 때 분석을 하고 제작할 때는 즉흥을 가미하는 건가요?

<창조적 진화> 때 처음 그렇게 했는데, <우리들의 2>는 더 즉흥적이었어요. 공부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시간 때우기 같은 느낌이에요. 공부와 별도로 작품 세계가 만들어지는 머리는 따로 있는 거예요. 단테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되나 할 때 가장 모델이 된 건 일본 나라의 절에 있는 머리가 세 개인 아수라 불상이었어요. 『신곡』을 읽었을 때 단테가 울다가 기절하다가 웃다가 행복해하다가 감정이 막 변하거든요. 여러 표정이 있는 불상을 토대로 헤어스타일은 당시 그림이나 동상의 머리에서 갖고 온다라든가.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 작품을 제가 좋아하는데, 단테 세계관은 이 작가 작품을 토대로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원작의 구조를 갖고 왔는데, 점점 제 작품 구조로 바뀌어가더라고요. 언어를 떠올리다 보면 그림이 조금씩 나와요. 빛, 피, 달걀, 성장. 꽃은 즉 신체다. 신체는 죽음이고 죽음은 빛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단어들이 생겨나가고 단어들을 재배치를 하게 되더라고요.



단테는 울보 아이고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 같았어요.

단테라는 사람은 지질한 느낌이 들거든요. 첫사랑인 베아트리체에게 말 한마디도 못 걸고. 베아트리체가 젊었을 때 죽었을 때는 충격받아서 기절해서 앓아눕는 등 감정적으로 격하기도 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많이 보이기도 해서 그렇게 표현을 했어요. 사실 베아트리체도 관세음보살 같은 이미지 외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어요. 처음엔 완전한 모습을 한 생명체로 등장하다가도 생생하고 젊은 모습으로 바뀌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불안정한 모습으로 바뀌고, 같이 날아오를 때는 어머니 같기도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단테와 닮은 표정과 비슷한 크기로 변하고 이내 서로의 표정이 함께 사라지잖아요.


모자처럼 보이던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마지막에는 남녀를 떠나서 비슷해지죠.

원곡에 대한 저의 해석이나 마찬가지죠.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데 그 모든 게 단테 안에 일어나는 걸로 보였어요. 베아트리체도 자기 안에서 나온 존재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던 거예요. 결국은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해서 마지막에는 똑같이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에 베아트리체가 나올 때도 원래는 긴 머리카락이 없었거든요. 남자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단테인지 아니면 베아트리체인지 계속 헷갈리게 만들려고 했는데, 라벤나 나이트메어 페스티벌 손님들한테 알기 쉽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거를 처음에 만들 때는 영화제 출품할 생각이 별로 없었고 같이 일했던 아틀리에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들 평소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분들이 아니어서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다시 구성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남녀로서 알기 쉽게 된 거예요.


베아트리체와 만난 단테는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잘려 있는 상태잖아요.

이 모든 게 단테 자신의 안쪽에 일어난 일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 여기에 나오는 애들도 다 단테가 복제된 거예요. 원작을 읽으면 사람들이 팔도 잘리고 다리도 잘리고 몸이 갈리고 그러잖아요. 사람들이랑 뒤엉키면서 몸들이 많이 부서진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를 그리려고 그랬거든요. 근데 저는 어떤 사람이 몸에 커다란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는 죽을 때까지 남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몸이나 팔이 재생된 표현을 하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해서 끝까지 이렇게 잘린 채로 표현을 했어요.


마지막 장면은 숨 쉬는 소리와 함께 빨간 파편들이 전부 명백한 하트가 되면서 끝나요.

저는 긍정적으로 표현할 생각이 없었는데, 긍정적으로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의외였어요. 천국이라는 게 어떤 구원을 받는 세계 같은데, 저는 아무것도 없는 공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무음으로 하면 관객들이 당황스러워할 테니까 소리가 없는 세계를 표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카이히루메 씨가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갖고 온 게 이 사운드예요. 너무 격렬하게 진행돼 와서 마지막에 사람들이 숨을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다 해서 여기서 호흡하는 소리를 넣어달라고 했어요. 저는 해피 엔딩도 아니고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는 공백 상태에서 영화가 끝났다’고 하려고 했어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잘한 하트를 너무 만든 거 아니에요?

나이트메어 페스티벌 냈을 때는 없었는데 나중에 넣었어요. 넣는 게 사람들을 좀 더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해서 넣었던 걸로 기억해요. 하트이기도 하고 불꽃이기도 해요. 캐릭터를 디자인을 해서 만든 게 아니라 모습도 계속 바뀌거든요. 모든 게 즉흥적으로 만들어져서 작화를 하면서 이때 모습도 다르고 이때 모습도 다르고 통일된 그림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음 작품 제목이 <생의 기쁨, 삶의 기쁨>이에요?

마티스(Matisse, Henri Émile Benoît 1869 -1954) 그림 ‘Joy of Life’라고 있거든요. 일본에서 출판된 화집을 보면 ‘생의 기쁨(生の喜よろこび)’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책도 있고 살아가다는 의미의 이끼루를 써서 삶의 기쁨(生きる喜よろこび)이라고 번역된 책도 있어요. 우리나라 말로 할 때 삶이라는 단어에 수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서 “생의 기쁨 삶의 기쁨” 이렇게.


작곡가 노르망 로저(Normand Roger)의 곡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했어요.

<나무를 심은 사람>(1987, 감독: 프레데릭 백) 작곡하신 분이에요.

맨 처음에는 그룹 1, 2, 3, 4, 5가 있어서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작품을 내는 거였어요. 그때는 “몬스트라 리스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만 상영됩니다. 만들겠습니까”라는 거였는데, 코로나로 프로젝트가 중지된 거예요. 야마무라 선생님한테 제가 그룹 1, 2, 3, 4, 5를 다 할 테니까 제 오리지널 작품으로 발표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원래 기획은 없어졌는데, 이번에 몬스트라 영화제에서 야마무라 선생님이 일본 대특집 프로그램을 짜셔서 제걸 넣어주셨어요. 내년 3월에 거기서 상영이 된대요. 2020년 3월에 들어가서 지금 그룹 4까지는 작화가 다 끝났거든요. 예전에는 디지털로 작화와 채색을 진행하였는데, 다시 핸드 드로잉으로 바꾸고 지금 계속 펜과 붓을 사용해서 종이에 채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왜요?

<우리들의 2>를 만들고 난 뒤에 저도 몰랐을 정도로 표현력에 엄청난 힘이 생긴 거예요. 옛날에는 아이디어를 짜고 설계한 내용을 비주얼로 한 게 애니메이션 작품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작화 때부터 굉장히 즉흥적으로 쭉쭉 그림이 만들어진 거 봤는데, 너무 강렬한 거예요.


너무 강렬해서 싫은가요?

작품을 만들면 제가 꼭 보여주는 친구들, 지인이나 선생님들이 계시거든요. 한 분, 한 분한테 다 연락을 해서 작품을 보여주는데,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가 제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긴 거예요. 가족들을 모아놓고 TV로 제 작품을 감상을 해줘요. <창조적 진화> 때까지 보고 제가 그런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알고 이 작품을 본 거죠. 근데 대 여섯 살짜리 애들을 데리고 본 거잖아요. <우리들의 2>는 대부분 영화제에서 18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되거든요. 그때 조금 섬뜩했어요.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맞는 건가 혼란이 많이 왔었어요. 친구들은 작품 잘 봤다 좋았다 얘기를 해주는데, 분명하게 <창조적 진화> 때 분위기와 다른 걸 감지했어요.


<우리들의 2> 만든 후에는 작화 실력이 또 한 번 더 업그레이드가 됐기 때문에 표현적으로 굉장한 걸 만들 수는 있는데, 그렇게 하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화 스피드를 떨어뜨려서 억제하려고 했어요. 프레임 레이트도 24장 풀 프레임이나 12 프레임으로 했는데, 8 프레임으로 떨어뜨렸어요. 좀 모자라고 부족하게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서 느꼈던 거를 해결을 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이 핸드 드로잉을 다시 갖고 와야 된다는 거죠. 핸드 드로잉을 하면 삐뚤빼뚤 움직이고 그래요. 8 프레임으로 통일을 해서 임팩트가 약간 떨어져요.



모티브가 된 작품이 마티스의 생의 기쁨, 삶의 기쁨인데, 곡에도 제목이 있었어요?

전체 곡의 제목은 없고 5개의 트랙에 각각 “그룹 1, 그룹 2, 그룹 3, 그룹 4, 그룹 5” 이렇게 제목이 붙어 있어요.


곡을 들었을 때 마티스의 작품이 떠올랐나요?

그룹 1, 2까지는 곡에서 나온 이미지에서 인스피레이션을 받아서 만들다가 3, 4로 넘어가면서 즉흥으로만은 안 된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파멸이나 죽음 그리고 폭력과 같은 부분을 강하게 표현하게 될 거 같아 그 중심을 잡아주는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그것들을 마냥 부정하는 게 아니라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마티스의 ‘생의 기쁨’이라는 제목을 갖고 오면 사람들한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뚜렷해지기 때문에 제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작업할 때마다 어둠의 유혹을 느꼈나요?

창작자가 어둠을 갖고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요. 제 안에서 폭풍우가 치고 소용돌이가 돌고 뜨거운 불꽃이 생겨나는 느낌이, 창작에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강렬해져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서로에게 상처 주고 다 함께 망해가다가도 재생되고 서로 포옹하고 홀로 날아오르는 등의 표현들이 등장해요. 어두운 부분을 어떻게 보듬고 잘 컨트롤해서,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작품을 선물할 수 있을지가 관건인 거 같아요.

 

인터뷰 2022년 11월 9일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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